중국 고전소설인 삼국지연의에서 백미는 적벽대전이다. 중국 패권을 놓고 조조와 손권이 충돌했던 적벽대전은 제갈량과 주유의 지략싸움이 세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갈량을 시기하던 주유는 여러 계략으로 그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지만 실패한다. 어느 날 조조를 상대할 계책을 논의하던 두 사람은 각자의 손바닥에 글자 하나를 적어 동시에 펴 보기로 한다. 두 사람의 손에 적힌 글자는 '火(불 화)', 이심전심이 이뤄진 순간이었다.
롯데 자이언츠 더그아웃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반복되고 있다. 20일 대전 한화 이글스전을 앞둔 롯데 김시진 감독은 경기 전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가방을 열었다. 그가 가방에서 꺼낸 건 라인업 카드, 거기에는 이날 출전 예정인 롯데 선수들의 타순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특이한 점은 김 감독이 꺼낸 라인업 카드가 두 장이라는 점.
물론 '위장 타순'과 같은 건 결코 아니다. 김 감독은 박흥식 타격코치와 따로 라인업 카드를 쓴다. 그런데 높은 확률로 출전 선수와 타순이 일치한다고 밝혔다. 김 감독은 "박흥식 코치와 상의해서 쓰는데 오늘도 글자 하나 다르지 않다"며 두 장의 라인업 카드를 보여줬다. 이 카드에는 상대 좌완선발 다나 이브랜드를 맞아 황재균(3루)-정훈(2루)-손아섭(우익)-전준우(중견)-박종윤(1루)-강민호(포수)-조성환(지명)-신본기(유격)-황성용(좌익)의 라인업을 들고 나왔다.

김 감독의 설명은 이렇다. "쓸 수 있는 자원이 한정적이다. 장성호 선수의 어깨가 좋지 않아 선발출전이 힘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러다보니 비슷한 라인업이 자주 나온다." 게다가 김 감독과 박 코치는 오랜 시간동안 코칭스태프로 호흡을 맞춘 사이다. 팀 전력에 대해 자주 의견을 나누다보니 같은 고민에 비슷한 답이 나온 것이다.
이 부분은 박 코치도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 박 코치 역시 "현재 선수들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한다. 부상이나 부진 등으로 선수기용의 폭이 좁아져서 사실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롯데는 팀 타율 2할6푼2리로 공동 6위, 41홈런으로 8위를 기록 중이다. 최근 김 감독은 "홈런이 나오지 않아 득점이 힘들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롯데는 경기당 평균 4.3득점으로 7위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박 코치는 "시즌 전 기대했던 선수들이 그 만큼 못 해주고 있다. 내 잘못"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박 코치는 "현재 우리 팀 선수들로 최상의 결과를 내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며 타격훈련을 하고 있는 제자들을 바라봤다.
이날 경기에서 롯데 타선은 8회까지 단 1득점에 묶이며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9회 하위타선이 물꼬를 터 결국 3득점을 더해 4-0으로 승리를 거뒀다. 사실상 마운드의 힘으로 따낸 승리. 1차 목표는 4강이지만 그 이상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타선의 분발이 절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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