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을 처리하는 게 업무인 특급 스파이 철수(설경구)는 북에서 망명을 신청한 핵물리학자 설희(한예리)를 국내로 데려오라는 지시를 받고 태국으로 날아가지만,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아내 영희(문소리)의 전화에 진땀을 뺀다. 북한과 미국을 비롯한 각국 정보요원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파괴력을 자랑지만, 달달 볶는 아내의 잔소리 앞에서 철수는 언제나 KO패다. 피 말리는 국제무대에서 쌓은 협상전문가라는 명함도 아내와의 사이에서는 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일 뿐이다.
영화 ‘스파이’(감독 이승준)는 남편과 아내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관계를 핵심 삼아 이야기를 끌어간다. 남편의 특수 직업을 알 리 없는 영희는 출장이 잦은 철수를 닦달하다 우연히 남편의 스파이 업무에 엮어들어 가게 되고, 이때부터 나라 지키랴 아내 구하랴 남편의 이중고가 시작된다. 아놀드 슈왈츠 제네거 주연 1994년 작품 ‘트루라이즈’와 설정이 흡사하지만 배우들의 열연이 이 같은 흠집 내기 쉬운 지적도 무마시킬 만큼 맛깔스럽다.
배우 설경구와 문소리는 잔소리 폭격을 늘어놓는 아내와 이에 사정없이 당하는 남편 역을 진짜 부부처럼 소화한다. 바가지 긁는 아내에게 찍 소리 못하다 못해 얻어맞기까지 하는 철수는 아내가 ‘비주얼 악당’ 라이언(다니엘 헤니)과 호텔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도 일편단심을 자랑해 ‘저 관계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하는 생각을 갖게 할 정도로 부부 사이의 특별함을 뭉근하게 지핀다.


부산 출신의 문소리는 평소 보다 한 톤 목소리로 걸쭉한 사투리를 내뱉으며 푼수기 넘치는 결혼 7년차 주부 역을 애교스럽게 소화했다. 해외 영화제에서 다수의 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의 오라는 잠시 접어두고 ‘스파이’에선 사정 없이 망가졌다. 설경구는 영화에서 다수의 액션신을 소화하지만 그 모습이 여타 첩보물 속 그것처럼 날이 서 있거나 하진 않다. 하지만 아내 앞에서 꼼짝 못하는 남편이면서 특급 스파이이기도 한 설정을 모두 소화하기엔 이 같은 허술함이 더 어울리는 듯 싶다.
복병은 철수의 스파이 동료로 출연하는 배우 라미란이다. 영화 속에서 ‘야쿠르트 요원’으로 불리는 라미란은 각종 직업으로 변신한 채 일촉즉발 상황 속에 투입돼 기발한 대사와 표정으로 감초 활약한다.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신해 병원에서 정액 체취 작업 중인 철수 앞에 나타나는가 하면, 제압해야 할 악당 라이언이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모습에 광대가 승천하는 표정으로 그야말로 웃음을 빵빵 터뜨린다.
영화는 코믹물이지만 태국 로케이션을 진행하고 카체이싱을 비롯해 헬기 폭파신 등이 등장하며 규모감을 자랑한다. 하지만 짜릿하기 보단 헐거움이 느껴진다. 그러나 ‘스파이’라는 작품에서는 이 같은 허술함이 오히려 더 어울리는 듯 싶다. 추석 연휴 가족·연인과 함께 배불리 먹고 마음껏 웃고 싶은 관객이라면 ‘스파이’를 강력 추천한다.
5일 개봉하며 15세 관람가다. 러닝타임은 1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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