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종반, 그 어느 해보다 과열된 4강 진출 후보 팀들의 뜨거운 순위다툼과는 달리 기록적으로 빈약하고 냉랭한 한 해를 보내고 있는 한국프로야구. 바다 건너 들려오는 일본프로야구의 투타에 걸친 대기록 도전과 행진소식이 마냥 부러운 요즘이다.
1964년 왕정치(요미우리)와 2001년 터피 로즈(긴테쓰) 그리고 2002년 알렉스 카브레라(세이부)가 각각 기록한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인 55홈런과 어깨를 나란히 한 블라디미르 발렌틴(야쿠르트)의 홈런신기록 도전.
여기에 시즌 개막 후 파죽의 20연승을 기록하며 1912년 루브 마쿼드(뉴욕 자이언츠)의 개막 19연승 기록을 갈아엎은 다나카 마사히로(라쿠텐)의 연승 기록행진까지. (개막 후 단일시즌 20연승은 1957년 이나오 가즈히사(니시테쓰)의 기록과 같지만, 이나오의 기록은 시즌 개막부터 세운 기록이 아니어서 내용면에서 차이가 있다)

다나카 마사히로의 기록행진은 이것이 다가 아니다. 지난해의 기록과 결부시키면1936~1937년 메이저리그의 칼 허벨(뉴욕 자이언츠)이 세운 24연승과 타이기록이기도 하다.
올 시즌 23경기에서 다나카가 거둔 성적은 20승 무패, 평균자책점은 1.24. 2007년 두산의 다니엘 리오스가 한 시즌 22승을 거둔 것을 마지막으로 씨가 마른 20승대 투수의 탄생은 고사하고, 매년 15승 언저리에서 다승 1위가 결정되곤 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면 다나카의 선발 20연승 기록은 그저 꿈 같은 먼 나라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현실이 궁핍하면 사람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마련이라고 했다. 다나카의 24연승기록을 보고 있자니 슬며시 오버랩 되는 우리의 기록이 하나 있다. 바로 정민태의 선발 21연승 기록이다.
정민태가 현대 유니콘스 소속으로 있던 2000년(7연승)과 일본무대에서 복귀해 맞이한 2003년(14연승), 두 해에 걸쳐 작성되었던 기록으로 당시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끌었던 기록이다.
물론 우리에겐 프로원년인 1982년 박철순(OB)이 세운 24연승 기록도 있긴 하지만, 다나카가 선발로서 세운 기록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박철순의 기록보다는 정민태의 기록이 성격상 비교하기에 좀더 가까워 보인다.
사실 선발투수의 연승기록은 출중한 실력이 우선되어야 가능한 기록이지만, 그 이면에는 운 역시도 상당부분 따라주어야만 세울 수 있는 기록이다. 아무리 선발투수가 잘 던져도 팀 타선이 제때 터져주지 않으면 승을 올릴 수 없다. 또한 선발투수가 난조에 빠져 먼저 실점을 내준 경우에도 팀 타선이 이를 만회해주지 않으면 패전투수가 되어 기록행진을 이어갈 수도 없다.
다나카가 지난 9월 6일 니혼햄과의 경기에서 9이닝 동안 2실점 완투승을 거두며 무패 상태로 시즌 20승 고지를 정복하긴 했지만, 기록이 중단될 수도 있는 위기를 넘겼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다나카는 이날 초반 제구력 난조로 선제 홈런을 맞는 등 2점 차의 리드를 빼앗겨 자칫 패전투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타선의 도움으로 역전승 할 수 있었다.
다나카의 기록에 견줄 수 있는 한국프로야구가 갖고 있는 정민태의 선발 21연승 기록도 속내를 뒤져보면 여러 차례 기록중단의 위기를 넘긴 아슬아슬한 이력을 찾아볼 수 있다.
정민태는 2003년 10연승에 도전하던 4월 16일 수원 삼성전에서 선발로 나와 김한수(삼성)에게 3점홈런을 허용하는 등, 5이닝 동안 6실점하며 4-6으로 뒤지던 상황에서 강판, 패전위기에 몰렸지만 팀이 8회말 동점을 만들어준 덕분에 패전투수로 기록되지 않아 연승기록의 중단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14연승 달성 후인 다음달 5월 20일, 잠실 LG전서는 3-4로 뒤지고 있던 8회말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9회초 타선이 4-4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 역시 패전위기를 벗고 연승기회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기록중단 위기장면의 가장 압권(?)은 5월 27일 수원에서 열렸던 대 KIA전이었다. 이날 정민태는 1회초부터 상대에게 타자 일순을 당하며 5피안타 3볼넷으로 무려 6실점, 3분의 2이닝 투구라는 치욕의 성적을 끌어안고 강판 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의 연승기록은 천운으로 살아남는 기적(?)을 경험한바 있다.
그가 0-6의 비하인드 상태에서 마운드를 내려온 뒤에도 팀은 추가실점을 거듭하며 1-10까지 내몰렸지만, 9회말 심정수의 끝내기 역전 3점홈런에 힘입어 경기결과를 12-10으로 돌려놓는 대 반전 그림을 현실로 그려냈던 것이다.
이처럼 큰 고비를 여러 번 이겨냈던 정민태의 선발 21연승기록이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경기는 9월 6일 수원에서 벌어진 삼성전으로, 자객(?)은 이승엽이었다.
선발 22연승 및 내심 박철순의 24연승 기록 경신까지도 꿈꾸었던 정민태는 이날 삼성전에서 7과 3분의 2이닝 동안 이승엽의 역전 2점홈런을 포함, 2피홈런 10안타 7실점의 부진 끝에 3-8로 경기를 내주며 패전투수로 기록되었다. 2000년 7월 25일 수원 롯데전에서 패전투수가 된 이후 첫 국내경기 패전이었다.
시즌 초반이라 연승기록이 화제로 대두되지 않은 시점이긴 했지만, 다나카 역시 지난 4월 23일 이대호가 몸담고 있는 오릭스와의 경기에서 8이닝 동안 이대호의 3안타를 포함, 무려 15안타의 뭇매를 맞고도 오릭스 불펜의 난조 덕에 9-3으로 승리하며 연승기록의 디딤돌로 삼은 바 있다.
이미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마쓰자카나 다르빗슈에 비해 과거 일본 자국리그나 WBC대회 성적이 상대적으로 부진해 지금과 같은 대기록을 작성하리라고는 일찍이 예상하지 못했던 다나카 마사히로의 선발 연승기록 행진의 끝은 언제쯤일는지.
지난해 미국으로 건너간 류현진에 이어 삼성 오승환과 KIA 윤석민의 해외 진출설까지, 특급 투수층의 유출이 빚어낼 척박한 투수기록 앞에서 시샘 가득한 눈길은 자꾸만 바다건너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다.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