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월화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는 기복이 심한 드라마다. 주인공이 겪는 갈등이 너무도 쉽게 발생하고, 너무도 쉽게 해결된다. 극 초반부터 이어진 밍숭맹숭한 전개는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지난 16일 방송된 ‘불의 여신 정이’ 23회는 광해(이상윤 분)가 역모죄에 휘말렸다가 대수롭지 않게 해결되는 싱거운 전개가 펼쳐졌다. 인빈(한고은 분)과 임해(이광수 분)의 계략으로 인해 광해가 선조(정보석 분)에게 대적하는 역모 누명을 쓴 것이 불과 22회 말미였다.
23회 초반에는 선조가 광해의 설득에 오해를 푸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광해는 자신이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안 후 억울해하기보다는 동인 세력이 왕권을 노리고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실을 강조했다. 선조는 광해의 한마디에 흔들리며 진노를 거뒀다.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광해는 근신 처분으로 끝났다. 인빈이 선조를 부추겼지만 통하지 않았다. 인빈만큼 황당한 것은 시청자였다. 광해를 위협했던 갈등이 불과 1회 만에 해결된 것. 물론 22회에서 유정(문근영 분)에게 사랑 고백을 했던 광해는 자신 때문에 유정에게 화가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랑하는 마음을 접었다. 유정 역시 신분의 차이와 광해가 곤경에 처할 수 있다는 생각에 거리를 뒀다. 갈등은 해결됐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또 다시 지지부진해졌다.
이 드라마의 핵심인 광해와 유정의 사랑, 왕권을 둘러싼 음모가 이토록 허무하게 일단락된 것. 물론 앞으로 이 드라마가 또 다시 위기에 빠지는 광해와 유정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리겠지만 그래도 이 같이 어설프게 갈등이 봉합되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불의 여신 정이’는 16세기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과학과 예술의 결합체인 조선시대 도자기 제작소 분원을 배경으로 사기장 유정의 치열했던 예술혼과 사랑을 그린다. 때문에 초반부터 유정과 광해는 끊임없이 곤경과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쉽게 갈등에서 빠져나오며 긴박한 전개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드라마가 안방극장이 격하게 아끼는 사극인데다가 성공 이야기를 담고 있어도 시청률 3위로 추락한데는 이 같은 쫀쫀하지 못한 전개에 있다. 인물들의 행동에 당위성과 개연성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마저도 흐름을 깨는 전개로 나열하다보니 어느새 다음 이야기가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드라마가 됐다.
심지어 23회 말미에는 유정이 친아버지인 줄 모르고 복수심을 품게 되는 이강천(전광렬 분)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과정 역시 심심하게 다뤄졌다. 유정이 지인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게 되는 나열식의 서술로 재미를 반감시켰다. 이 드라마는 무려 32회로 기획됐다. 풀어낸 이야기는 많았는데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는 반복되는 위기와 맥없이 풀려버린 갈등 밖에 없다. 남은 9회 동안 이미 떠나버린 시청자들을 돌려세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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