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 있어 출연작 중 소중하지 않은 작품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연기 경력 30년의 베테랑이거나 갓 데뷔한 신인이거나, 출연작이 많든 적든 자신의 필모그래피는 자랑스러울 것이다.
때문에 '도둑들' 보다 '관상'의 이정재에게 더 큰 점수를 준다고 하는 건 다소 실례일지 모르나 어쩔 수 없다. 1300만 관객을 모은 '도둑들', 아니면 데뷔 초기 미모 리즈 시절의 '태양은 없다' 혹은 인지도를 끌어올린 드라마 '모래시계'까지, 그 어느 작품보다도 '관상'이 지금껏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작품이라는 데 많은 관객들이 동의하는 분위기다.
개봉 7일째 300만 관객을 돌파한 '관상'에서 이정재는 야심 가득한 수양대군을 열연했다. '관상'은 왕의 자리가 위태로운 조선, 얼굴을 통해 앞날을 내다보는 천재 관상가가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 송강호가 천재 관상가 내경 역을 맡았고 이정재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좌에 오른 계유정난의 주역 수양대군으로 분했다.

2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을 능수능란하게 끌고 가는 주인공 송강호나 유일한 홍일점 김혜수, '조선판 납득이' 조정석 그리고 요즘 대세라는 이종석의 존재감은 이정재의 등장 이후 급격하게 떨어지는 느낌. 이정재표 수양대군은 영화 시작 1시간이 지나서야 나타나지만 후반부를 쫄깃하게 만드는 주역이다. 이정재로 인해 긴장감이 팽팽해지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비로소 리얼하게, 입체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송강호와 김혜수, 조정석 그리고 이종석까지 워낙 화려한 캐스팅 때문에 이미 기대작이었던 '관상'은 그 중에서도 이정재를 가장 잘 '써먹으면서' 멀티 캐스팅의 정점을 찍었다.
왕위를 탐하고 역모를 꾸미는 수양대군은 분명 악역이고 그래서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야욕에 반하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 통념일 텐데 도리어 수양대군의 그 핏빛 쿠데타에 감정을 이입하게 된 건 이정재의 매력 때문이다.
일단 탄탄하고 다부진 몸매와 조각같은 얼굴에서 뿜어져나오는 카리스마가 관객을 압도하는 가운데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호탕하면서도 절제된 이중적 매력의 연기가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한다. 살기 어린 눈빛도, 칼자국 선명한 얼굴도, 냉기가 밴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더듬어본 그의 필모그래피 중 단연 압권이다. 어느덧 데뷔 20년차에 든 이 배우는 비로소 힘을 뺀 연기를 구사하고 있다.
천만 영화(도둑들)도 칸 입성작(하녀)도 접고 이제는 이정재의 대표작으로 '관상'을 꼽을 날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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