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는 빌딩 속 사람들을 구하는 소방관도 아닌, 스쳐가는 사람들을 기억하는 감시반 반장도 아닌, 나라의 운명을 짊어진 스파이도 아닌 배우 설경구는 소시민으로 돌아왔다. 야구를 좋아하고 딸의 머리 묶기는 서툴지만 가족을 사랑하는, 영화 ‘소원’ 속 평범한 가장 동훈으로 말이다.
여느 가정의 평범한 아버지로 돌아온 그이지만 ‘소원’에서 설경구의 감정은 평범하지 않다. 지우지 못할 끔찍한 사건을 겪은 뒤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모습을 봐야 하는 아버지의 감정을 표현해내야 했던 것.
하지만 영화 속에서 설경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의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런데 보는 이들은 울지 않는 설경구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러한 아이러니에 대해 설경구는 울지 않으려 노력한 것이 관객들에게 더 아프게 다가간 것 같다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영화 속 슬픈 감정들이 관객들에게 많이 돌린 느낌이라고.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계산을 했어요. 원래 계산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입만 떼면 울 것 같더라고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울지 않으려고 되게 노력했어요. 그게 더 힘들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촬영하면서 울었던 장면들도 나중에 보니까 감독님이 삭제한 것도 있더라고요.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감정이 과잉 되면 짜증나잖아요. 그래서 철저하게 절제하려 했죠. 연기를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한 거예요. 그게 오히려 관객들에게 아프게 다가간 것 같아요.”
설경구는 ‘소원’ 시나리오를 제안 받고도 시나리오에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만큼 ‘소원’이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 설경구가 ‘소원’을 선택한 건 상처는 밖으로 돋아야 치유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원’이 복수보단 치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단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처음엔 관객 분들이 꺼려하는 마음이랑 똑같이 ‘피해자들이 잘 살고 있을 텐데 왜 끄집어 낼까’라는 마음이 있어서 쉽게 시나리오를 읽지 못했어요. 영화가 주는 파급력이 있잖아요. ‘도가니’는 도가니법을 만들었고 ‘실미도’도 역시 그렇고요. 그래서 ‘왜 자꾸 상처를 끄집어내’라고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아예 보지 않았는데 제 부인이 먼저 봤어요. 보고 저한테 ‘그런 영화 아니니까 감독님 만나봐’라고 이야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끔찍한 사건을 다루지만 복수가 아닌 ‘아직 세상은 살 만 하구나’ 거기에 초점을 맞춘 거였어요. 그리고 상처는 왜 덮어요. 상처는 돋아나야 치유가 되는 거잖아요. 안에만 있으면 곪아 터지고 더 큰 병을 일으킬 수 있어요.”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다룬 ‘소원’이었지만 설경구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촬영 현장 분위기는 화기애애 그 자체였다고 전했다. 촬영하면서 찍은 코믹한 사진들도 보여주며 “정말 재미있었다”라고 싱글벙글,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즐거운 촬영 분위기의 중심엔 이준익 감독이 있었다.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는 이준익 감독에 대해 설경구는 말이 잘 통한 감독이었다고 애정을 표했다.

“이준익 감독님이어서 이번 영화를 편하게 찍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든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시기도 하고(웃음). 촬영 현장에서 실없는 소리도 하고 농담도 하고 그러면서 분위기를 띄우셨어요. 저는 처음에는 ‘왜 감독님이 농담하고 그럴까? 감정을 자꾸 깨는 거 아냐’라는 생각 때문에 한마디 한 적도 있어요. 그런데 감독님이 그러더라고요. ‘나까지 우울해 봐. 분위기가 어떻겠어’라고요. 특히 그러면 아역배우들이 연기를 못하거든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무거운 현장 분위기를 눈치채요. 진짜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현장 분위기는 즐거웠어요. 그 따뜻했던 분위기가 영화에 고스란히 담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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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