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자동차 브랜드 토요타자동차는 그 뿌리가 방직기에 있었다. 토요타자동차 설립자인 토요다 키이치로(1894~1952)는 아버지 사키치가 이뤄놓은 직기 공장을 발판으로 일본에 자동차 산업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방직공장에 입사한 20대 중반의 게이치로는 미국 뉴욕을 다녀 온 후 자동차를 만들기로 마음을 굳혔다. 아버지를 설득해 자동차 제조에 뛰어들기로 방침을 세우고 자동차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933년 시보레 승용차의 분해 조사에 들어갔고 1934년 실린더블록 주조에 성공했으며 1935년 시작차를 개발했다. 1936년 토요타시에 공장 부지를 확보했고 1937년 마침내 토요타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토요타자동차는 그러나 1940년대 태평양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한 자금난, 그리고 사회 변혁기에 찾아오는 노동쟁의에 시달렸다. 격동의 시기를 어렵게 극복한 끝에 1955년 마침내 본격 일본산 승용차 ‘크라운’을 양산하게 됐다.

일본의 국산자동차는 토요다 게이치로의 노력에 의해 ‘크라운’에서부터 그 시작을 알렸다. 1959년 경제 부흥기에 급속 성장을 거듭하며 종전의 고로모 시는 이름을 아예 토요타 시로 바꾸면서 일본 자동차 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일본인의 손으로 일본 차를 만들겠다”는 게이치로의 일념으로 탄생한 토요타 최초의 생산형 자동차는 그러나 1936년 9월에 발표된 ‘토요타 AA’형이다. 그런데 이 차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제조사의 브랜드명은 ‘토요다’였다.
‘토요다’가 ‘토요타’가 된 시기도 ‘토요타 AA’가 탄생한 1936년의 일이다. 당시 회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브랜드 공모를 했다. 브랜드에 ‘토요다’가 반드시 반영 돼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일본 전국에서 2만 7000여 건의 응모작들이 몰렸는데 그 중의 한 명이 ‘토요다(TOYODA)’에서 철자 한 글자만 바꾼 ‘토요타(TOYOTA)’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성씨를 자동차 브랜드로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있던 차에 발음도 좋은 ‘토요타’가 제시 되자 고민이 한꺼번에 풀렸다. 그때부터 토요다 가문의 기업이 만들어낸 자동차 이름은 ‘토요타’가 됐다.
성공한 대부분의 기업들이 그렇듯이 자동차 개발 초기에는 어려움이 무척 많았다고 한다. 미국 자동차 메이커와의 제휴를 통해 기술을 도입할 수도 있었지만 “직접 개발해 만들지 않으면 내 기술이 아니다”는 철학 아래 고집스러운 자체 개발을 해 나갔다. 비슷한 시기 실제 일부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이 제휴 방식을 통해 미국 차를 도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요다 게이치로는 쉬운 길을 가지 않았다. ‘기술 토요타’의 뿌리가 여기서 다져졌다.
토요타의 서비스 철학 ‘현지현물(現地現物)’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토요타에서 생산한 차가 운행 중에 문제가 생기면 게이치로 사장이 현장을 직접 찾아가 운전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수리에 들어가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한다.

직접 발로 뛰어 문제가 발생한 현장에서 현물을 보고 바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덕목은 토요타의 ‘고객제일주의’의 기반이 됐다. 현장을 직접 가지 않고 보고나 전언만으로 상황을 판단하지 말라는 현장 중심의 철학이기도 하다.
끊임없는 기술 연구로 최상의 상품을 개발해 오류를 줄이도록 노력하되 만에 하나 오류가 발생하면 지체 없이 현장으로 달려가 그 자리에서 바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철학은 ‘하이브리드’를 선도하고 있는 토요타자동차의 핵심적인 덕목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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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생산 된 본격 일본 국산차 ‘토요페트 크라운 RS’. 가운데 사진은 1936년 9월에 발표 된 토요타 최초의 생산형 승용차 ‘AA’. ‘TOYOTA’ 브랜드명이 확립 되기 전이라 휠에 새겨진 ‘TOYODA’가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