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담을 갖기보다 내심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앞으로도 잘 던지면 느린 공은 한계가 있다는 말이 안 맞게 되니까요”.
아무리 빠른 공을 갖췄더라도 기본적인 제구력과 원하는 곳에 던질 수 있는 배짱이 없다면 그 투수는 성공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두산 베어스 좌완 유희관(27)은 빠르지 않은 공이라도 자신감과 제구력이 기본으로 갖춰졌다면 충분히 1군 무대에서 제 위력을 떨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유희관은 지난 9월30일 잠실 LG전 선발로 등판해 5이닝 동안 7피안타(탈삼진 2개, 사사구 1개) 2실점으로 5-2로 앞선 6회말 무사 1,2루서 홍상삼에게 마운드를 넘기고 물러났다. 뒤를 이은 홍상삼이 승계주자 실점을 막으며 선배의 호투를 지켰고 쐐기점까지 나오며 유희관의 시즌 10승으로 이어졌다.

이는 신인왕 경쟁자인 NC 이재학에 앞서 10승 고지를 선점한, 신인왕 경쟁에도 파도를 몰아칠 수 있는 뜻깊은 승리다. 더불어 유희관은 전신 OB 시절이던 지난 1988년 윤석환 전 투수코치가 13승을 올린 이후 25년 만에 베어스 좌완으로는 첫 한 시즌 10승을 수확했다. 1990년 구동우(9승) 현 NC 코치, 2001년 이혜천(9승)이 고지에 근접했으나 결국 등정에는 실패했다. 외국인 투수까지 포함해도 지난 2004년 17승으로 공동 다승왕이 된 게리 레스 이후 9년 만이다.
이재학과의 신인왕 레이스에서 주도권을 내주는 듯 했던 유희관은 10승 선점으로 자신이 호락호락한 경쟁자가 아님을 제대로 보여주고 경쟁 판도에 불을 붙였다. “재학이가 1일 넥센전에서 10승을 못 따내도 재학이가 나보다 조금 더 우세하지 않을까 싶다”라며 겸손하게 이야기한 유희관은 실감나지 않는다면서도 자신이 세운 10승 기록을 뿌듯해했다.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시즌 전만 해도 제 목표는 개막 엔트리 진입이었는데 개막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어떻게 출장 기회를 얻다보니 10승을 따냈네요. 25년 만의 팀 국내 좌완 10승이라. 앞으로 팀에도 계속 남는 기록일 테니 뜻 깊습니다. 선발과 계투를 오가는 것이 힘들기는 해도 기회 자체에 감사하고 있어요. 팀에서도 제 몸 상태 등에 대해 잘 관리해주시니까”.
올 시즌 유희관의 성적은 40경기 10승6패1세이브3홀드 평균자책점 3.48로 수준급이다. 최고구속은 135km 가량으로 대다수 1군 투수들과 비교하면 확실히 느리다. 그러나 슬라이더-체인지업-커브 등 다양한 변화구와 안정된 제구력. 그리고 첫 풀타임 시즌을 치르는 투수 답지 않은 수싸움 능력까지 보여주며 시즌 중반 위기를 맞았던 두산을 구했다. 전임 외국인 좌완 개릿 올슨의 공백을 메운 투수가 바로 선발 보직까지 꿰찬 유희관이다. 그만큼 팀 공헌도는 기록 그 이상이다.
그를 일컬어 주위에서는 ‘느림의 미학’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러나 그와 함께 “공이 느린 투수가 올 시즌 꾸준히 롱런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부호도 붙었다. 좋은 로케이션을 지닌 투수지만 스피드의 한계점은 분명히 있고 그와 관련한 우려의 시각과 편견도 많았다. 선수 입장에서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달가울 리 없다.
“느린 공에 대한 한계와 편견과 관련한 이야기는 저도 들었어요. 그러나 부담이 되기보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앞으로 잘 던지면 그 이야기들은 안 맞게 되니까요. 후반기 슬럼프에 제 스스로 나태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주변에서 ‘느림의 미학’이라고 주목해주셔서 제 스스로 들뜨지 않았는지 더 노력해야 했어야 한다는 생각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페넌트레이스 동안 최선을 다한 유희관에게 남은 것은 포스트시즌. 아직 4위 두산이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할 지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할 지 확정된 것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유희관이 선두 삼성-2위 LG 등 강팀을 상대로 강한 면모를 비춘 기교파 투수라는 점. 넥센을 상대로도 유희관은 4경기 1승1패1세이브 평균자책점 3.77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단 포스트시즌은 페넌트레이스와 엄연히 다른 무대. 가을 야구 초보 유희관은 그 큰 무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미지 트레이닝도 해봤어요. 오히려 적당한 긴장감이 약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은 지면 끝인 시리즈나 마찬가지잖아요. 되도록 팀이 포스트시즌 동안 길게 살아남았으면 좋겠어요”. 강팀을 상대로 더욱 강한 유희관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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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