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cm의 단신이었으나 NBA를 주름잡았던 스타 플레이어 앨런 아이버슨은 “농구는 신장이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고 팀의 뒷심 부족으로 빛을 잃었으나 ‘느림의 미학’ 좌완 유희관(27, 두산 베어스)의 9일 투구는 “피칭은 스피드가 아니라 심장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도 나올 법 했다.
유희관은 9일 목동구장에서 벌어진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로 등판해 7⅓이닝 동안 3피안타(탈삼진 5개, 사사구 5개) 1실점으로 호투했다. 타선이 상대 선발 앤디 밴 헤켄의 호투에 묶이며 점수를 단 한 점도 지원해주지 못해 유희관의 빛나는 호투는 노디시전으로 끝났다. 대타 오재일의 타점이 유희관에게 승리 요건을 주었으나 뒤를 이은 홍상삼의 블론세이브가 귀신 같이 이어져 승리 투수가 되지는 못했다.
팀은 9회 2-1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9회 동점 허용에 이어 결국 연장 10회말 2-3으로 끝내기 패배. 밀리지 않는 투수전을 펼친 유희관의 호투 가치를 높이지 못했다. 그러나 유희관은 분명 잘 던졌다. 사사구 5개를 기록한 것이 옥의 티였으나 위기 상황에서 침착하게 코스 분배를 하는 배짱이 돋보였다. 백미는 박병호와의 대결이었다.

박병호는 지난 8일 1차전서 1회 솔로포와 함께 두 개의 사사구를 얻어내며 3타석 모두 출루했다. 또한 9회말 이택근이 2사 2,3루서 끝내기 우전 안타를 때려낸 데에는 “박병호 타석에서 주자를 쌓지는 말자”라는 두산 측의 전략이 부메랑이 되어 날아간 이유도 컸다. 1차전서 거포이자 두산 상대 4할 천적의 아우라를 비춘 박병호다.
그 박병호와의 대결인 만큼 경기 전부터 유희관이 박병호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지난 7일 미디어데이서 올 시즌 자신을 상대로 4타수 2안타 강점을 비춘 박병호에 대해 “그래도 홈런은 안 맞았다. 퓨처스리그서부터 대결했는데 두렵다는 느낌은 갖지 않았다”라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유희관은 호투로 그 이야기가 허세가 아님을 보여줬다.
첫 대결은 1회말 2사 1루. 그러나 유희관은 몸쪽 공도 서슴없이 던지며 박병호에게 코스를 고민하게 했고 결국 박병호는 유격수 땅볼로 아웃되었다. 3회 2사 1루서는 박병호가 칠 수 있는 공을 때려냈고 이는 꽤 큰 포물선을 그렸으나 결국 중견수 플라이로 이어졌다. 느린 공이지만 묵직한 공이라 담장을 넘지는 못했다.
6회말 이택근을 삼진처리한 유희관은 박병호와의 세 번째 대결서 인코스 공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은 뒤 높은 직구로 유인해 우익수 뜬공으로 박병호의 무안타를 이끌었다. 거포에게 몸쪽 공으로 카운트를 잡은 것은 자칫 한 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으나 유희관은 이를 무릎 선 약간 위 스트라이크로 제구했고 결국 방망이를 이끌어 플라이 처리했다.
무엇보다 뛰어났던 것은 그의 강심장. 대체로 몸쪽 공은 리그를 주름잡는 에이스급이 아닌 이상 던지기 힘들다. 자칫 상대에게 큰 타구를 허용할 수 있는 만큼 뛰어난 제구력이 바탕되어야 하기 때문. 그러나 유희관은 이날 데뷔 첫 포스트시즌 출장인 백업 포수 최재훈과 호흡을 맞춰 오른손 타자 몸쪽을 찌르는 130km대 초중반의 직구를 자주 던졌다. 이는 박병호를 비롯 우타 중장거리 및 거포가 많은 넥센의 허를 찔렀다.
승리투수가 되지는 못했고 팀은 계투난에 휩싸여 패했다. 그러나 유희관은 에이스로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뛰어난 호투를 선보이며 상대 선발 밴 헤켄의 호투에 맞서 명품 투수전을 펼쳤다. 25년 만에 베어스가 찾은 한 시즌 10승 좌완 유희관은 올 시즌 팀이 건진 최고의 히트상품이자 빅게임 피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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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백승철 기자 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