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를 지켜보면 압도적인 투구 내용은 아니다. 그러나 볼을 남발하지 않고 실점 위기에서 과감하게 자기 공을 던진다. 그래서 수비 선수들의 피로 누적도를 낮춰준다. 포스트시즌 4경기 째 무실점 중인 두산 베어스 외국인 투수 데릭 핸킨스(30)의 수훈은 분명 팬들도 염두에 둬야 한다.
지난 7월 부상과 부진으로 아쉬움을 사던 좌완 개릿 올슨을 대신해 한국땅을 밟은 핸킨스는 페넌트레이스 12경기 3승3패 평균자책점 6.23에 그쳤다. 올슨보다는 나았으나 그래도 외국인 투수임을 감안하면 아쉬움이 크게 남았다. 결국 핸킨스는 포스트시즌 선발 로테이션에 포함되지 못하고 계투진에서 경기를 준비하게 되었다.
선수 본인도 팀의 요청에 흔쾌히 계투 보직으로 이동하겠다고 밝혔다. 사실 핸킨스는 과거 두산이 도미니카 윈터리그 당시 계투로 처음 보았던 투수. 계투로는 괜찮은 구위를 보여주며 두산의 환심을 샀고 연결고리를 이어가다 올해 한국에 입국했다. 정통 포심은 아니지만 땅볼 유도형 투심을 갖추고 있는데다 볼을 남발하지 않아 계투로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코칭스태프의 생각이었다.

가을 핸킨스는 의외로 팀의 가려운 부분을 잘 긁어주는 효자다. 넥센과의 준플레이오프 4차전서 첫 포스트시즌 출장에 나선 핸킨스는 0-1로 뒤진 6회초 2사 1,3루 위기서 강정호를 3구삼진으로 처리하며 선발 이재우의 승계 실점을 막았다. 최재훈의 투런 후 7회말에는 2사 후 허도환, 서건창에게 중전 안타를 내줬으나 문우람을 중견수 플라이로 처리하며 2-1 리드를 이어 승리투수가 되었다.
LG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핸킨스는 어찌어찌 버티며 무실점 행진을 이어갔다. 2차전 0-2 패배 때는 이재우의 뒤를 이어 등판해 2⅓이닝 3피안타 2사사구 1탈삼진으로 내용은 다소 안 좋았다. 그러나 귀신 같이 결정타는 피해가며 실점하지 않았고 이재우의 승계주자 실점도 없었다. LG 선발 레다메스 리즈에게 단 1안타로 묶이며 영패했으나 LG 방망이를 묶은 덕분에 분위기가 크게 침체되지 않았던 두산. 핸킨스의 공도 분명 높이 평가할 만 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4차전서는 7이닝 1실점으로 호투한 유희관의 뒤를 이어 2이닝 2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으로 세이브를 따냈다. 플레이오프까지 핸킨스의 성적은 3경기 1승1세이브 평균자책점 0. 여기에 25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2차전서는 홍상삼의 바통을 이어받아 8회말에 등판했다. 1-1 1사 1,2루 역전 위기였는데 여기서 핸킨스는 이승엽과 김태완을 연속 땅볼로 잡아냈다. 2이닝 1사사구 무실점. 연장 10회 정형식에게 볼넷을 내준 것이 유일한 피출루였다.
이닝 당 주자 출루 허용률(WHIP)은 1.36, 피안타율 2할1푼2리. WHIP이 특급 수준은 아니지만 용케 배트 중심을 피해가는 투구로 피안타율이 낮다. 야수들의 덕도 봤지만 실점 위기에서 씩씩하게 타자들이 어려워하는 공을 던진 핸킨스의 공도 컸다. 포수 최재훈이 과감함과 안정성을 겸비한 리드를 펼쳤고 핸킨스도 그에 따라 잘 제구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볼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 핸킨스는 다소 유순해보이는 인상이지만 승부욕만큼은 누구 못지않은 외유내강형 투수. 투구 패턴도 느리지 않기 때문에 수비 위치에 선 야수들을 지치게 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계투로 출장하면서 직구 평균 구속도 140km대 초반에서 중반에 가깝게 올라왔다. 투심의 움직임이 결정적인 순간 좋아 수비가 빈 코스로 흐르지 않는 한 안타 허용 가능성도 낮다. 화려하지 않아도 충분히 잘 하고 있는 핸킨스다.
페넌트레이스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해 큰 기대를 얻지 못하고 포스트시즌을 시작한 핸킨스. 그러나 핸킨스는 결정적인 순간 치명타를 피하는 흥미로운 투구로 미스터 제로가 되고 있다. 2010년 두산은 외국인 좌완 레스 왈론드의 활약 덕택에 롯데와의 준플레이오프를 2연패 후 3연승으로 통과했고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서 최종 5차전까지 버틸 수 있었다. 핸킨스는 그 왈론드보다 더욱 화려한 수훈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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