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유희관,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 빛난 느림의 미학
OSEN 이우찬 기자
발행 2013.11.14 10: 12

경쟁이 지배하는 시대다. 경쟁에서 이기려면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스마트폰은 3G와 4G를 넘어 그 이상의 빠름을 추구하고 있다. 아이들은 경쟁 속에 남보다 빨리 선행 학습에 몰두한다. 빨리 가지 않으면 진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냉혹한 프로야구 세계도 마찬가지다. 남보다 느린 공으로 타자를 압도할 수 없다. 하지만 올해 프로야구는 두 명의 ‘느린’ 투수가 지배했다. 오른손 투수 이재학(23, NC)과 왼손 투수 유희관(27, 두산)이 주인공이다. 140km대 후반을 넘나드는 빠른 직구가 보편화 된 야구에서 두 투수의 활약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느리지만 타자를 이겨냈다.
유희관의 직구 평균 구속은 130km대 초반이다. 오른쪽 다리를 높이 드는 등 투구 폼은 역동적이고 크지만 구속은 느리다. 뛰어난 제구력과 몸 쪽 승부가 유희관의 장점이다. 여기에 70~100km대 저속 커브를 섞어 던졌다. 이후 몸 쪽 직구를 던지면 구속 차이는 최대 60km가 나는 경우도 있다. 타자로서는 당황스러운 부분. 유희관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무기다”라고 했다.  

유희관의 또 다른 무기는 몸이 가진 내구성이다. 많은 공을 던질 수 있다. 유희관은 100개 이상의 투구를 해도 “나는 몸이 아픈 경우가 없다. 오래 던지는 것은 상관없다”고 자주 말한다. 유희관은 올해 최고 투구수 129개 등 두 차례 120개 이상 투구했다. 마운드에서 지치지 않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것도 유희관이 살아남는 이유.
김경문 NC 감독은 “유희관의 공은 낮게 오고 요소요소 변화가 있어서 공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구력도 뛰어나다”고 덧붙였다.
이재학의 무기는 단연 체인지업이다. 사실상 직구와 체인지업 두 구종만 던진다. 이재학은 지난 8월 27일 대구전에서 117개 투구수 가운데 체인지업을 58개 던졌다. 직구는 50개, 슬라이더는 9개를 각각 기록했다. 이날 이재학은 8이닝 1실점으로 호투했다. ‘이재학=체인지업’ 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알고도 때리기 힘들다.
이재학은 똑같은 투구 폼에서 직구와 체인지업을 던져 타자들을 당황시킨다. 직구 제구가 되는 날에는 체인지업의 위력은 배가 된다. 이재학의 직구 평균 구속은 130km대 후반이다. 체인지업 구속은 120km대 중후반이다. 결코 빠른 구속이 아니지만 공략하기 힘들다. 또 공의 움직임이 살아있다.
유희관은 10승 7패 1세이브 3홀드 평균자책점 3.53을 기록했다. 이재학은 10승 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8을 기록했다. 평균자책점 10위 안 투수 가운데 이재학과 유희관의 직구 평균 구속은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오승환의 150km를 넘는 ‘돌직구’와 리즈의 160km를 넘는 광속구 사이에서 이재학과 유희관의 느린공은 오히려 빛을 잃지 않았다. 두 투수는 프로 무대에서 살아남았다. 자신의 약점보다는 강점을 극대화했다. 빠름이 지배하는 시대 느려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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