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이' 이영표(36)가 유니폼을 벗었다. '철인'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축구공과 함께 27년을 보내온 남자가 그라운드에서 물러나 또다른 미래의 출발선 앞에 선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보내며 그와 함께 우리의 2002년도 함께 보내줘야할 시기를 맞았다.
이영표는 14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자신의 27년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은퇴 공식 기자회견을 가졌다. 한국 축구가 낳은 전설이자 대표팀의 영원한 왼쪽 풀백으로 기억될 그는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 2006 독일월드컵 본선행, 2010 남아공월드컵 사상 첫 원정 16강행을 이끌며 태극마크의 가치를 드높인 선수 중 한 명이다.
그 자신에게 있어서도 태극마크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이영표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태극마크를 달고 뛴 155경기는 마음 속에 영원히 간직할 것"이라며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시작한 축구다. 하지만 태극마크에 손을 올릴 때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내가 아닌 우리라는 것을 느꼈다"고 뜨거운 자부심을 보였다.

축구선수로서 최고의 경기, 또 기억에 남는 경기를 꼽아달라는 질문에도 "어느 한 경기를 꼽을 수 없다. 하지만 대표팀 경기에 나설 때 축구라는 것이 단순한 나만의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 나라를 대표해서 뛴다는것이 얼마나 기쁘고 가슴 설레는 일인지 알았다"며 "대표팀 유니폼 입고 뛴 경기는 모두 소중하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이처럼 각별하게 대표팀의 기억을 품고 있는 이영표의 이름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가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다. 비단 이영표만이 아니다. 홍명보, 황선홍, 박지성 등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당시의 영웅들은 표현 그대로 한국 축구의 신화가 됐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거대한 성과를 일군 2002년의 기억은 붉은 DNA로 가슴 깊숙한 곳을 늘 뜨겁게 달군다. 잊혀지지 않을 영광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2002년을 너무나 많이 돌이킨다. 되새김질하고 또 되새김질하며 그 때의 영광을 곱씹는데 급급하다. 이영표는 이날 "다른 선수들이 내게 체력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다. 나만 알고 있을 때 은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고 은퇴를 결심하게 된 이유를 밝혔다. 의미가 깊은 말이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결정하고 행동해야한다는 각오가 묻어나는 이야기다.
우리의 2002년도 그렇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동안 2002년의 영광에 묶여 있었다. 황홀하게 반짝였던 영광의 시기를 좀처럼 놓지 못하고 자꾸만 돌아보기 일쑤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2년의 K리그 올스타전이다. 리그의 가장 큰 흥행카드인 올스타전에서도 2002년을 끌어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로부터 꼭 10년째가 되는 뜻깊은 해였기에 그럴 수 있다 싶지만, 한국 축구가 2002년의 기억에 지나치게 발목잡혀있는 것은 아닌가 자문하게 되는 기획이기도 했다.
2002년의 스타들은 끊임없이 불려나온다. 이렇다할 흥행요소가 없는 K리그의 현실이, 한국 축구의 현실이 그들을 자꾸만 '소환'한다. 적어도 2002년의 추억을 불러오면 '평타'는 칠 것이라는 안일함이 그 때 그 붉은 돌풍을 끌어들이는 셈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지나치면 모자란 것만 못한 법이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은 그 때의 기억만으로 현재의 한국 축구를 지탱하려는 시도는 위험하고, 또 불안하다. 과거에 사로잡히기보다 미래를 준비해야한다.

이영표의 은퇴는, 그와 함께 우리가 우리의 2002년을 보내줘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계기일지도 모른다. 6년 전부터 은퇴를 고민했다는 이영표는 남몰래 눈물을 흘리며 은퇴 후의 시간에 대한 처절한 고민을 계속했다. 모두가 이영표에게 "아직 뛸 수 있지 않느냐, 지금 떠나기엔 너무 아쉽지 않느냐"고 묻지만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다. "다른 선수들이 내게 체력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늦은 시기다. 나만 알고 있을 때 은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는 답변에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떠나야한다'는 진리가 묻어있다.
2002년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가슴 뜨거운 흥분과 짜릿한 기억을 품고 있는 이들이 존재하는 한,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신화는 한국 축구에 있어 "아직 뛸 수 있는 선수"다. 언제든지 불러올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기억을 놓아주어야할 때다. 즐거웠던 기억, 한국 축구의 아름다웠던 순간으로 놓아두고 더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할 시점이다. 대표팀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 2002년에서 벗어나 그들을 응원할 때다. 우리는 이영표와 함께, 2002년의 아름다운 기억도 함께 보내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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