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께서 제일 축하해주셨지요. 그동안 부모님께서도 힘든 일이 많으셨으니”.
대학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해 배팅볼 투수, 독립리그팀을 전전하다 신생팀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연이은 부상으로 인해 낙마했고 결국 또다시 독립리그팀에 몸을 담았다. 그곳에서도 고비마다 크고 작은 부상이 발목을 잡았으나 간절함은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었다. 고양 원더스 출신으로 두산 베어스에 신고선수 입단한 좌완 여정호(29)는 절실함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길 바랐다.
부산상고(현 부산 개성고)-동국대를 거친 1984년생 좌완 여정호는 대학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지 못했다. 우리 히어로즈(현 넥센)의 배팅볼 투수로 야구와의 연을 이어갔으나 배팅볼 투수는 정식 프런트와 달리 고용 승계가 되지 않는 불안정한 직업. 이후 여정호는 일본 지바 롯데 테스트도 치렀으나 부상으로 인해 낙마한 뒤 하와이 독립리그에서도 뛰는 등 쉽지 않은 야구 인생을 걸어왔다.

간절한 마음이 빛을 볼 기회가 찾아온 것은 9구단 NC 트라이아웃 합격. 그러나 이번에도 여정호는 부상으로 인해 제 빛을 못 보고 자신의 첫 프로 입단팀의 1군 무대를 함께하지 못했다. 올해 여정호는 독립리그팀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고 국내 퓨처스팀과의 교류전서 7경기 8이닝 평균자책점 5.63을 기록했다. 기복이 있는 편이었으나 좌완으로서 특수성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좌완 투수진이 상대적으로 열세인 두산에 신고선수로 입단할 수 있었다.
15일 잠실구장에서 여정호는 퓨처스팀 동료들과 훈련을 함께 했다. 선수 출신 엄경훈 퓨처스팀 매니저는 “볼 좋은데”라며 그의 기를 북돋워주었다. 자칫 다시 잡을 수 없던 야구공을 아직 쥐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여정호에게는 행복이다. 여정호의 최고 구속은 144km 가량으로 평균 구속은 140km대 초반. 타자들이 타이밍을 맞추기 어려운 투구폼을 지녔다는 평을 받아 두산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11일 합류해서 1주일 가까이 훈련 중인 것 같아요. 두산은 젊은 선수들이 많아서 분위기가 화기애애한 것 같습니다. 팀 내에 부산중, 동국대 출신 후배들이 있어서 적응에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요. (서)동환이나 (김)동한, (유)창준이 등 후배들이 많이 도와줘 고맙네요”.
국내는 물론 미국, 일본도 건너가며 어떻게든 야구를 하겠다는 일념 하에 거친 20대를 살았던 여정호. 부모님도 넉넉지 않은 환경 속에서 여정호에게 힘을 북돋워주었다. “두산 입단이 결정되었을 때 당연히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부모님”이라며 여정호는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데 기뻐하면서도 말 끝을 흐렸다.
“어떻게든 야구를 끝까지 해보려는 스스로의 마음이 컸던 것 같아요. 두산에서 오퍼가 온 줄은 사실 잘 모르고 있었어요. 한 달 전 ‘두산으로 갈 수도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해둬라’라는 언질을 받았지요”.
원더스 감독은 다름 아닌 김성근 감독. 선수들의 입에 단내가 날 정도로 맹훈련을 시키는 지도자로도 유명하지만 그 과정에서 잡초 근성으로 일어서는 선수도 많다. 김 감독으로부터 어떤 조언을 받았는 지에 대해 묻자 여정호는 “잔부상이 있었으니 몸 관리를 가장 우선시하고 훈련에 있어서는 평소처럼 잘 하라는 말씀을 하셨다”라고 답했다. 이전 원더스 출신 프로 선수들에게 김 감독은 “죽기 살기로 열심히”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는데 여정호에게는 ‘평소처럼’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점은 눈에 띄었다. 그냥 성실한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성실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장점을 짚어달라는 질문에 “꾸준하게 야구에 달려드는 끈기”를 꼽은 여정호는 반대로 단점을 자평해달라고 묻자 “기복이 심하고 다혈질의 성격이라 마인드컨트롤 능력이 부족했었다. 과욕을 가장 경계해야 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새 소속팀 두산은 좌완 선발 유희관 외 마땅한 좌완 불펜이 없어 포스트시즌 혈전을 치르면서 내내 약점을 지적받았던 팀. 왼손 투수 여정호에게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고 아직 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다른 좌완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다.
“솔직히 왼손 투수인 만큼 언젠가 제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반면 일말의 두려움과 부담도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일단 1군 선수가 되고 자리를 잡고 나서 어떤 선수가 되고 싶다는 목표를 밝힐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좌완 계투로 뛸 수 있는 만큼 팀이 잘 되면 제 개인성적도 좋아질 수 있는 보직입니다. 가능하다면 올해 한국시리즈 준우승한 우리 팀이 우승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탤 수 있었으면 합니다”.
거액의 계약을 성공시키고 대박을 꿈꾸는 FA 선수들의 머니 게임이 한창인 현재. 그 가운데서도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야구에 대해 진지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선수들이 있다. 연이은 좌절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은 여정호는 다음 시즌 자신의 진짜 서른 잔치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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