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터는 배구 코트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린다. 경기를 자신의 손으로 좌우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하지만 그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감독들의 불호령도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 권리에 따라오는 책임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18일 천안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현대캐피탈과 러시앤캐시와의 경기 후 양 팀 감독들은 세터들에 대해 한 목소리를 냈다. 패장이었던 김세진 러시앤캐시 감독은 “리시브가 좋지 않아 모든 것을 탓할 수는 없다”라면서도 “있는 그대로 풀어나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세터 이민규의 토스가 완전히 아니었다”며 이례적으로 쓴소리를 했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는 설명이었다.
승장인 김호철 현대캐피탈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김 감독은 팀 주전 세터 권영민에 대해 “차츰차츰 나아질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한 경력이 있는 선수다”라며 믿음을 드러냈지만 “어느 때는 이 쪽으로, 어느 때는 이 쪽으로 공을 줘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인데 세터들이 그것을 혼돈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앤캐시의 추격에 쫓겼던 2세트 중반 토스 배분에 대한 지적이었다.

세터들은 여러 가지 패를 손에 쥐고 있다. 좌우로 벌려주는 큰 공격은 물론 리시브가 잘 된다면 속공이나 시간차를 쓸 수도 있다. 자신의 2단 공격까지 합치면 이론적으로는 총 5명의 공격수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상대 블로커들을 속이는 가위바위보 싸움에서 승리할 때 가장 큰 쾌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때문에 최대한 상대 블로커들을 빼내는 토스를 하고자 하는 욕구가 잠재되어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생각이 많을 경우 오히려 덫에 걸릴 수도 있다는 게 감독들의 걱정이다. 이날은 이민규가 경기 내내 그랬다는 것이 김세진 감독의 평가다. 권영민 또한 2세트 중반 그런 모습으로 김 감독의 ‘호통’을 받는 장면이 방송 전파를 탔다. 명세터 출신인 김호철 감독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수의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쉽게 갈 수 있는데 본인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지 않나 생각한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처럼 다양한 공격도 좋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가장 확률 높은 공격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감독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김세진 감독은 “공격력이 가장 좋은 선수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단언한다. 세터들도 이를 알고 있지만 중요한 순간 냉정을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패착이 되기 마련이다. 가장 확률 높은 패를 써보지도 못하고 주저앉는다면 팀 분위기에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없다. 감독들이 가장 허탈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신치용 삼성화재 감독은 팀의 주전 세터 유광우에게 항상 “겉멋을 부리지 마라”고 주문한다. 사실 세터 출신인 신 감독도 다양한 공격을 하고 싶어하는 세터의 본능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승부처에서는 대개 좋지 않은 결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유광우를 다그치는 것이다. 역시 명세터 출신인 신영철 한국전력 감독은 “세터가 나눠먹기를 하는 순간 팀은 무너진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하루 아침에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서 세터들에 대한 감독들의 불호령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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