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 대한항공 감독은 2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던 지난 19일 LIG손해보험전 패배 이후 외국인 선수 마이클 산체스(27)을 불렀다. 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지적은 아니었다. 이리저리 심신이 지친 마이클의 속내가 궁금했다.
마이클의 활약상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높은 타점과 체공력을 바탕으로 한 공격이 일품이다. 25일 현재 올 시즌 리그 득점 4위(402점), 서브 1위(0.49개)에 올라있다. 그런데 최근 코트 내에서 얼굴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공을 때린 뒤 체념하는 모습도 더러 눈에 들어왔다. 세터와의 토스가 맞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공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마이클이 심리적으로 흔들린다면 최대의 위기에 봉착할 수 있었다.
김 감독도 마이클의 심정을 알고 있다. 대한항공은 올 시즌 주전세터였던 한선수가 군 복무를 위해 팀을 떠났다. 오프시즌 중 한선수의 토스에 길들여져 있던 마이클로서는 낭패였다. 여기에 대체 세터로 투입된 황동일은 마이클과의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연습과 실전에서의 차이가 크다는 게 김 감독의 고민이다. 세 번째 세터 백광언이 투입되고 있지만 승부처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있다. 마이클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아무리 팀을 생각하는 외국인 선수라고 해도 이런 상황을 모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김 감독도 이런 점을 걱정했다. 달래줄 심산이었다. 그런데 마이클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김 감독의 예상과 달랐다. 마이클은 세터와의 호흡 문제가 나오자 “그것 때문은 절대 아니다”라고 펄쩍 뛰었다. 마이클의 최근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는 팀 성적 때문이었다. 마이클은 “경기에서 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 화가 났을 뿐”이라고 김 감독에게 설명했다.
김 감독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속으로는 ‘됐다’ 싶었다. 김 감독은 25일 대전에서 열린 삼성화재와의 경기를 앞두고 마이클과의 면담 내용을 소개하며 “참 고맙다”라고 했다. 외국인 선수가 팀 성적에 대해 책임감과 투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이런 점은 국내 선수들도 배울 필요가 있다”라고 칭찬했다. 그리고 그 마이클의 표정이 2시간 뒤 환하게 밝아졌다. 팀이 드디어 승리했기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25일 대전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삼성화재와의 경기에서 3-0으로 이겼다. 5연패를 마무리하는 순간이자 삼성화재전 12연패의 사슬을 끊는 것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마이클이 있었다. 25점을 올렸고 가장 중요한 20점 이후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12-19라는 절대적인 열세를 뒤집은 3세트에서 마이클은 ‘전사’와 같은 포효로 팀원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다.
이렇게 외국인 선수가 남다른 투지로 앞장 서 팀을 끌자 대한항공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살아났다는 것이 이날 경기를 지켜본 배구 관계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었다. 연패에서 탈출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뭉친 대한항공 선수들은 결국 드라마같은 3세트 역전극을 써 내리며 얼싸안았다. 그리고 기쁨의 현장에서 가장 뜨겁게 소리 지른 선수 중 하나가 바로 마이클이었다. “이제 기량만으로는 최고의 외국인 선수가 될 수 없다”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 마이클의 투지와 헌신이 대한항공이라는 기체를 힘차게 밀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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