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의 도입연도가 1904년으로 바로잡혔다. 대한야구협회는 지난 12월 17일 서울 마포가든 호텔에서 ‘한국야구의 기원 정정 선포식’을 갖고 그동안 잘못 전해져 내려오던 1905년 야구기원설을 수정, 1904년으로 반포했다.
그에 따라 한국야구는 2014년에 도입 110주년을 맞게 됐다. 한국야구의 출발 시점을 1904년으로 바로 잡은 것은 뒤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그 동안 대한야구협회가 옛 사료들을 충분히 검토한 데 따른 당연한 귀결이다.
왜 1904년인가

1904년을 한국야구의 기원으로 삼은 가장 중요한 근거는 체육기자의 선구자인 이길용 선생이 1930년 4월 2일부터 16일까지 에 14회에 걸쳐 연재했던 이다.
조선야구사 첫 회에 이르되, ‘야구 토산국(본바닥)인 아메리카로부터 일본을 거쳐 조선에 수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인 서력 1904년 봄이다. 바로 그 전해 가을에 당시 한국 황실의 하사금과 기타 내외국인의 의연금으로 경성의 종로에 창설한 지금의 중앙기독청년회(당시 황성기독청년회) 창립 때가 10월 말이라 시즌을 기다려 이듬해 봄부터 청년회 창설 공로자인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 씨가 청년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기 시작하니 이것이 조선 사람의 손으로 야구를 만지고 던지며 받기를 비롯한 야구사의 처음이었던 것이다.’고 정리해 놓았다.
이길용 선생의 이 기사는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한국야구사 기록이자 한국야구의 기원을 규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다.
이길용 선생의 주장은 그 뒤 1932년 일본인 오시마 가츠타로의 로 이어졌다. 오시마의 는 일제시대 한국야구의 도입 시기를 명확하게 기술해 놓은 유일한 단행본이다. 오시마는 그 책에서 ‘야구의 기원을 찾아보면 메이지 37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고 명기했다. 오시마는 그 책을 짓는데 이길용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고 밝혀 1904년설 또한 이길용의 주장을 수용했을 것이다. 그 이후 해방 뒤 한글로 된 최초의 야구규칙서인 최문혁 발행의 (1947년)은 물론 김창문의 체육대감(1957년) 등에도 야구의 국내 도입 시기는 1904년으로 명기돼 있다.
정설로 내려오던 1904년 기원설이 뒤틀린 것은 한국체육사 연구의 선구자인 나현성 서울대 교수가 1958년에 출간했던 에서 1905년으로 오기(誤記)하면서부터였다. 나현성 교수는 오시마의 가츠타로의 를 참고문헌으로 들었다.

1904년이 1905년으로 엉뚱하게 둔갑한 것은 아주 단순한 실수로 비롯됐다. 나현성 교수는 오시마의 에 나오는 한국야구의 보급 시점 ‘메이지(明治) 37년(메이지 1년은 1868년)’을 1905년으로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그 후 숱한 한국체육사학자들이 그대로 답습하는 오류를 범하게 됐고, 는 물론 심지어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공동으로 편찬한 (1999년)마저 1905년 설을 그대로 싣는 바람에 한국야구사의 출발이 1년 늦어버린 것이다.
서울YMCA는 2009년에 펴낸 에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 1904년으로 수정해놓았고 대한체육회도 서울YMCA의 주장을 수용, 2010년에 출간한 에서는 야구도입연도를 1904년으로 바로잡았다.
1904년 기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 합당한가
한국 근대체육은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모든 종목에 걸쳐 그 역사를 규명할 1차적인 사료인 문헌이 태부족이다. 그 동안 야구의 도입 시기를 놓고 초창기 야구인들의 증언도 불투명한데다 부실한 사료를 근거로 여러 갈래의 주장이 난무해 왔다. 여태껏 학자들이 맹신해온 1905년설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져 1904년으로 앞당겨 정정했지만 여전히 1904년 정설에 대해 의문부호를 다는 체육학자 등이 있다.
물론 이길용 선생조차 ‘조선야구사’의 머리글에서 ‘우리에게는 참고 됨직한 아무런 문헌을 불행히 갖지 못했다. 또한 변함없이 야구경기를 잇대어 보아온 사람이 없는 형편이므로 지난 일을 물어서 알만한 곳도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고 한탄했다. 그만큼 실증적인 사료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한국야구의 도입이 1904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한다는 주장을 펴는 이들도 1905년설이 틀렸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손환 중앙대 교수는 2011년 12월 27일 특별기고문에서 ‘한국야구사에서 1905년이라고 되어 있는 한국야구의 원년은 1904년으로 수정되어져야 하며 이러한 사실을 더욱 더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필립 질레트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할 것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홍순일 한국야구박물관자료수집위원장 역시 KBO가 발행하는 월간야구잡지 2012년 1월호와 자신의 블로그(2012년 1월 5일)를 통해 ‘한국야구의 시발, 1905년이 아니다’는 주장을 펴면서 1905년설의 오류를 지적함과 동시에 ‘1901년 9월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내한한 질레트는 1902년 여름, 평양에서 열린 하령회에서 숭실학교 학생들과 공을 주고 받았다’는 것은 ‘야구를 했다는 게 아닐까’하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런데 손환 교수와 홍순일 위원장은 2013년 12월 24일치 인터뷰를 통해 ‘한국야구 도입원년에 대해 재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손환 교수와 이가람 씨가 2011년 9월 에 공동 발표한 ‘한국최초의 야구경기 고찰’이라는 논문과 등을 근거로 한국야구의 시발을 재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최초의 야구경기고찰’은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의 기사에 실린 1896년 4월 25일 서울거주 미국인들과 미국 해병대원 사이에 벌어졌던 경기가 한국 최초의 야구경기라고 언급했다. 그 해 6월 23일에 열렸던 경기에는 서재필 박사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이름으로 6번 타자, 중견수로 출장한 사실과 에 1899년 2월 3일(음력) 인천에 있는 일본영어야학회에 다니던 후지야마 후지사와라는 일본인의 일기장에 ‘베이스볼이라는 서양식 공치기를 했다’는 기록 등을 예로 들어 한국야구의 기원을 1904년으로 결정한데 대해 자신의 처음 주장을 뒤집고 재검토 필요성을 제기하고 나섰다.
야구의 도입 시기를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는 동네 공놀이가 아닌 한국 사람들이 누구에게 조직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느냐를 출발점으로 삼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서재필의 야구경기 출장은 이 땅에서 야구경기가 처음으로 열렸던 시점은 될 수 있을지언정 한국야구의 기원을 삼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서재필은 1893년에 미국 컬럼비아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귀화(미국 국적 취득), 필립 제이슨이라는 미국이름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미국인’ 필립 제이슨이 미국인끼리 이 땅에서 야구를 한 것을 두고 어떻게 한국야구의 기원으로 삼겠는가.
마찬가지로 인천 거주 일본인의 야구경기에 대한 것 역시 ‘일본인끼리’ 공치기 놀이를 한데 지나지 않는다.
서재필의 야구선수 출장 기록이나 일본인 일기장은 구한 말 야구라는 외래 종목이 조선반도에서도 행해졌다는 정황이나 참고 기록은 될 수 있겠지만, 그같은 자료가 한국인과의 연관성을 규명하는데는 미흡하다.
필립 질레트가 황성기독청년회(YMCA) 총무로 부임하기 전 평양에서 야구를 가르쳤다는 얘기는 오시마 가츠타로의 앞머리에도 나온다. 오시마는 ‘질레트 선교사가 경성에 부임하기 전 평양에 1, 2년 있으면서 두셋의 동호인에게 야구를 시험해봤고, 숭실대학생들에게도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한국야구의 기원을 질레트가 황성기독청년회 회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한 1904년으로 명기해 놓았다. 질레트가 평양에서 야구를 가르쳤다는 얘기는 앞으로 규명해야할 대목이다.
1904년보다 훨씬 늦은 시점을 주장한 기록도 물론 있다. 초창기 야구선수 출신으로 1919년 조선체육회 창립 발기인이이자 해방 이후 대한야구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던 이원용은 1950년대 대표적인 종합잡지인 1956년 6월호에 실린 ‘야구반세기의 야화’라는 회고를 통해 오히려 ‘1907년’을 주장했다.
이원용은 “우리나라에 야구경기가 어느 때 누구의 손을 통해 들어왔느냐에 대해 신빙할만한 문헌이 아무 것도 없다.”면서 “중학시대부터 YMCA 야구선수 현홍운, 허성, 현동순 씨 들과 교유하였으므로 그 때 들어서 남아 있는 기억으로는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 씨가 1907년에 비로소 YMCA 회원들에게 야구를 지도한 것이 우리나라 야구사의 첫 페이지”라고 술회했다. 그렇지만 이원용은 조선체육회 창립을 1919년(실제는 1920년)으로 기억하는 등 연도가 오락가락, 신뢰하기 어렵다.
한국야구사의 도입원년은 일단 1904년으로 바로 잡혔다. 앞으로 획기적인 문헌이 나오지 않는 한 이는 정설로 인정받을 수밖에 없다.
대한야구협회가 한국야구의 기원을 1904년으로 확정한데 대해 일부 인사들이 ‘성급한 결정’이라고 반문한 것과 관련, 되묻고 싶다. 1905년설이 틀렸다고 이미 판명된 마당에 야구사와 각종 교과서에 잘못 기재돼 있는 것을 언제까지 그대로 두고 볼 것인가.
1905년 설의 오류가 4, 5년 전부터 확인돼 뒤늦게나마 대한야구협회가 야구사를 바로잡았는데 그렇다면, 체육학자들은 그 동안 왜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며 지금까지 무엇을 했는가. 오히려 기초적인 사실 오류조차 바로잡지 못한 학계의 무관심과 나태함을 질타 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정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 관계가 잘못됐다면 우선 바로 잡아야하는 게 마땅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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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기원은 1904년이라고 최초로 밝힌 이길용 선생과 야구연혁에서 1904년을 명기해 놓은 해방 이후 최초의 야구규칙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