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후 문학구장. 대다수의 선수들이 오전 개인 훈련을 마치고 퇴근한 그 시점, 한 선수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박진만(38, SK)이었다. 그 시점 경기장에 남아 있었던 선수들은 신인급 선수와 재활 선수들이 전부였다. 의외였다.
이를 지켜본 한 구단 관계자는 “요즘 박진만이 경기장에서 가장 늦게 퇴근한다”라고 설명했다. 보통 선임급 선수들은 비활동기간에는 경기장에 나오지 않거나 일찍 훈련을 마치고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SK도 다르지는 않다. 그래서 묵묵히 웨이트 트레이닝에 열중하는 박진만의 사정이 더 궁금했다. 이유를 묻자 사람 좋은 미소가 돌아왔다. 몇몇 이유가 있다고 했다. 개인훈련도 훈련이지만 주장으로서의 임무도 하나의 이유였다.
박진만은 2014년 SK 선수단의 주장으로 선임됐다. SK의 올해 주장 선임은 ‘직선 투표’로 이뤄졌다. 마무리캠프에서 주장 임무를 한 김강민 이상의 연차를 가진 모든 선수들을 놓고 선수단 전체가 무기명 투표를 했다. 이 과정에서 박진만이 조인성과 결선 투표 끝에 주장으로 선출됐다. 이에 대해 이야기하자 박진만은 “사실 주장은 중간급 선수가 하는 것이 가장 좋다. 그래야 어린 선수들도 좀 더 편하게 다가설 수 있다”라면서 “어린 선수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싶어 내가 더 부담이 된다”라고 웃었다.

삼성 시절 주장을 역임한 적이 있는 박진만이다. 주장의 책임감을 잘 안다. 그래서 그럴까. 박진만은 “주장이 되는 순간 개인적인 목표는 머릿속에서 싹 사라지더라. 팀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 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상황도 녹록치 않아 더 고민이 크다. 2007년부터 6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던 SK는 지난해 6위까지 미끄러졌다. 좌절이었다. 이런 여건에서 주장직을 맡은 박진만의 어깨는 더 무거울 수밖에 없다. 팀 재건에 위한 고민이 얼굴 곳곳에 묻어난다.

하지만 박진만만한 주장감도 없다는 것이 구단 안팎의 지적이다. 선수단 내에서 신망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이기는 팀’의 상황을 가장 잘 아는 선수이기 때문이다. 현대, 삼성을 거치며 한국시리즈 우승만 6번을 차지한 박진만은 항상 정상권 팀에 몸담아왔다. 그 분위기를 잘 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지난해 SK의 분위기적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도 잘 알고 있고 해결책도 손에 있다는 의미가 된다.
박진만은 “성적이 잘 나는 팀은 항상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이 친구 같다. 가족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그러면서 바퀴처럼 맞물려가는 것이다”라고 경험을 이야기한다. 소통의 힘이다. 반대로 성적이 안 나는 팀은 “말들이 많다”라고 단언한다. 박진만은 “지난해 SK는 밖에서 봤던 것, 그리고 내가 2년 몸담은 경험으로 볼 때 팀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개인적인 플레이들이 조금 보였다. 끈끈하게 의기투합하는 것이 SK의 강점이었는데 지난해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라고 냉철한 반성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박진만은 그런 좌절이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박진만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 안 좋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겨울에 추웠던 것이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지난해 실패가 올해는 약이 될 것이라 내다봤다. 이런 분위기 전환을 위해 스스로가 앞장서고 있다. 최대한 많은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자연스레 퇴근 시간도 늦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박진만은 책임감에 불타고 있다. 박진만은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사이에서 이야기를 많이 할 생각이다. 선수들의 필요한 부분을 코칭스태프에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도록 하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그러면서 박진만은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한다. 캠프 전까지 최대한 많이 선수들을 만나보겠다”라면서 다시 다른 선수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대화 말미, 박진만은 “올해 또 다른 SK의 모습이 기대된다”라고 했다. 그 또 다른 SK의 모습은 박진만의 ‘명품 행보’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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