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수(29, 러시아명 빅토르 안)의 역습이 시작됐다.
안현수가 '쇼트트랙 황제'의 본모습을 과시하며 2014 소치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기지개를 켰다. 지난 20일(이하 한국시간) 독일 드레스덴에서 열린 2014 유럽쇼트트랙선수권대회 1000m에서 1분 24초 940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안현수는 3000m 슈퍼파이널과 5000m 계주까지 휩쓸며 전날 500m에 이어 대회 4관왕에 올랐다.
특히 5000m 계주에서는 전성기 못지 않은 기량을 선보이며 4위로 레이스를 펼치던 러시아 대표팀을 단숨에 1위로 끌어올리는 저력을 보였다. 채 열 바퀴를 남기지 않고 1/4 가까이 앞서나가며 승리를 확신한 네덜란드 대표팀의 싱키 크네흐트가 분통을 삼키지 못하고 '손가락 욕'으로 메달 박탈을 자초했을 정도로 놀라운 역주였다.

유럽선수권대회이기에 찰스 해믈린(캐나다)이나 J.R.R 셀스키(미국) 등 유력한 '베테랑' 메달 후보들이 참가하지 않았지만, 이번 대회에서 안현수가 보여준 모습은 소치를 향한 청신호 그 자체였다. 그동안 부상 여파와 소속팀 해체, 파벌 문제로 러시아 귀화를 선택하면서 공백기를 가졌던 안현수는 2006 토리노동계올림픽 이후 8년만에 다시 서는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컨디션을 전성기에 가깝게 끌어올렸다.
이름만으로도 버거운 안현수의 존재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 있어 충분히 위협적이다. 귀화 후 적응기간과 몸을 만드느라 잠시 부진했던 시간을 금세 털어내고 유럽선수권대회 4관왕에 오르면서 상승세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안현수는 자신이 왜 '쇼트트랙 황제'라 불리는지 스스로 증명했다.
올림픽 무대에 돌아온 안현수는 "소치동계올림픽만을 기다려왔다. 소치의 승리자가 되겠다"며 금메달에 대한 결연한 각오를 밝혔다. 안타까운 갈등 끝에 고국을 버리고 스케이트를 선택한 그가 다시 올림픽 무대에 선 만큼, 그의 목표는 시상대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하고 있다. 특히 이번 소치동계올림픽은 그가 귀화한 러시아에서 열리는 대회인만큼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안현수의 귀환은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에 있어 부담스러운 일이다. 선발전을 통해 세대교체에 들어간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은 올림픽 전 국제대회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며 우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다. 부상으로 낙마한 노진규(22, 한국체대) 대신 계주에서 뛰게 된 이호석(29, 고양시청)을 제외하면 올림픽 경험이 전무한 선수들이다보니 실전의 긴장감을 이겨내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 한국 쇼트트랙을 잘 알고 있는 안현수의 존재는 더욱 큰 부담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다. 파벌싸움으로 인해 귀화라는 극단적인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빅토르 안'에 대한 국민 여론도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는 무거운 부담으로 작용한다.
국민들은 '빅토르 안'에게 호의적이다. 안현수를 내친 대한빙상경기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까지 전이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해 목동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쇼트트랙 월드컵 2차대회서 안현수는 한국 대표팀의 그 어느 선수보다 더 큰 환호와 응원을 받았다.
선수들 역시 안방에서 열린 대회에서 러시아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의 마음을 모를리가 없다. 하지만 '빅토르 안'을 연호하는 팬들의 외침이 한국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의 사기에 영향을 미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해묵은 파벌싸움의 여파가 어린 선수들에게까지 또다른 피해를 끼치고 있는 셈이다.

윤재명 남자 쇼트트랙 대표팀 감독은 이런 점을 우려해 "빅토르 안도 그저 한 명의 외국 선수일 뿐"이라며 선수들이나 언론이 지나치게 안현수를 의식하는 것을 지양했다. 그러나 안현수는 이제 눈감고 외면할 수 없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의 가장 큰 라이벌로서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2012년 2월부터 러시아 대표로 뛴 안현수는 2012-2013시즌 6차례 월드컵 시리즈 개인전에서 메달 금3, 은1, 동2개를 따냈다. 그리고 2013-2014시즌 월드컵 시리즈 4번의 대회를 거치며 개인전에서 금2, 은4, 동2를 기록했다. 상승세를 탄 지금 상태라면 소치에서도 100%의 레이스를 펼칠 가능성이 높다.
동계올림픽 쇼트트랙에서 한 번도 메달을 목에 걸지 못한 러시아는 안현수를 적극 지원하며 그에게 첫 메달을 기대하고 있다. 안현수가 '놀랍다(Amazing)'고 표현할 정도의 훈련환경과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러시아의 비호 속에서, 안현수가 아닌 '빅토르 안'으로서 8년만의 정상탈환에 도전하는 그의 존재는 한국 남자 쇼트트랙에 있어 거대한 벽 그 자체다. 과연 한국은, 빅토르 안이라는 거대한 벽을 넘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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