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자이언츠 내야수 정훈(27)은 이번 겨울 처음으로 '연봉 협상'이라는 것을 해봤다. 이제까지는 구단이 제시하는 금액에 사인을 하고 나오는 게 일이었는데, 올해는 정말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 밀고 당기기까지 했다.
작년 그의 연봉은 4200만원, 올해는 3800만원 올라 연봉 8000만원을 받게 됐다. 작년 주전 2루수로 한 시즌을 뛴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셈이다. "원래 연봉협상날은 사무실 들어가서 바로 '네 알겠습니다' 하고 도장찍고 나오는 날이었어요. 근데 이번에는 그냥 나오기도 해보고 협상도 마음껏 해 봤죠."
또 하나의 신고선수 신화를 쓴 정훈. 이제는 신고선수들의 롤 모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다. 당연히 지금 자리까지 올라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정훈에게는 조금은 더 특별한 스토리가 있다.

▲ 야구로부터 멀어졌던 야구소년
용마고 출신 정훈은 2006년 현대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당시를 회상하며 정훈은 "잘못된 생각으로 프로에 뛰어들었다. 프로만 가면 다 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한 몇 년 하다보면 주전도 되고, 연봉도 2~3억 받고 그럴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가니까 2군에도 잘 하는 친구가 너무 많았다"고 말했다.
정훈의 현대 입단 동기는 강정호(넥센)와 황재균(롯데), 신현철(SK), 유재신(넥센) 등 쟁쟁한 선수들이었다. 정훈은 "2군에서도 내 서열은 6~7등이었다. 경기에도 못나가는 날이 많아졌다. 결국 1년 만에 현대에서 방출 당했다"며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방출 소식을 알리며 아버지로부터 처음으로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구단으로부터 '재계약 못 하겠다'는 전화를 받고 (현대 2군 원당구장이 있었던) 일산을 떠나 마산으로 갔죠. 실감이 안 나서 웃으며 부모님께 '잘린거 같아요'라고 말씀드렸더니 아버지께서 '내가 뒷받침 못해줘서 그런 거 같다. 미안하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원래 정말 무뚝뚝한 분인데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기분이 묘했어요. 당연히 눈물이 났죠."
방출 후 2주 동안 방에 틀어박혔던 정훈은 고교 친구들의 성화에 집밖으로 나섰다고 한다. 한 친구가 '차라리 이참에 군대에 다녀오라'고 말했고, 정훈은 말 그대로 술김에 PC방에 가서 입대를 신청했다.
지금은 사라진 의정부 306 보충대를 통해 입대한 정훈은 9사단에 배속 받아 훈련소 생활을 시작했다. 정훈의 보직은 81mm 박격포, 가장 힘든 병과 가운데 하나다. 지금도 정훈이 잊지 못하는 장면은 바로 행군하면서 바라봤던 원당야구장, 바로 현대 2군 야구장이었다.
"군대에 갔을 때는 진짜 야구생각 안 하고 살겠다고 다짐했어요. 훈련소가 일산에 있었는데 마침 행군 도중 원당야구장 뒷산으로 지나가게 됐죠. 불과 두 달 전까지 내가 머물렀던 그 곳, 여전히 하우스에는 밤인데도 불이 켜져 있고 나는 군장 메고 행군하고…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제가 다시 야구를 시작하게 될지 몰랐죠."
▲ 생산직 근로자와 야구 사이에서 갈등하다
이후 정훈은 현역병으로 군복무를 무사히 마쳤다. 그 시간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야구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야구를 보기는 했다. 자신의 현대시절 동기였던 강정호, 황재균이 1군에서 자리 잡아 맹활약을 펼치자 친구들을 응원하며 야구를 봤다고 한다. 말년휴가를 나와서는 고교 선배이자 팀 선배인 조정훈에게 부탁해 사직구장 표를 얻어 히어로즈와의 경기를 보기까지 했다. "(동기들이 뛰는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고…그 때부터 조금씩 야구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실 정훈은 제대 후 생산직 근로자로 취직을 준비하기까지 했다. "야구특기생으로 한 공장에서 사람을 뽑더라고요. 안정적인 일이기도 했고 수입도 나쁘지 않아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야구를 다시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잘리는 게 무서웠죠. 그 과정이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요. 신고선수는 한계가 있어요. (지명 받은 선수와) 똑같으면 지는 거고 최소 2~3발은 앞서야 동급 대우를 받을 수 있었어요."
정훈은 공장 대신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갔다. 잘 알려진 대로 고교시절 은사 소개를 통해 창원 양덕초등학교 코치 일을 시작했다. 공을 만지다보니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살아났고, 용마고 박동수 감독 권유로 롯데 신고선수 테스트를 받아 합격했다. "이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아버지께서 '1년만 더 해봐라. 젊으니까 해도 안 늦다'고 말씀하신 게 도움이 많이 됐다. 계산을 해보니 내가 대졸선수랑 나이가 같더라. 게다가 군대까지 해결했으니 절대 늦은 게 아니었다."
롯데에 신고선수로 입단한 정훈은 미친 듯이 야구를 했다. "잠시 야구에서 멀어지니까 야구가 재미있더라고요. 코치님들이 저를 위해 고생하신다는 걸 알게 되기도 했고요. 그 때는 미친 듯이 야구를 했어요. '야구 실력이 늘어가고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고요.“
이후 정훈은 하나씩 목표를 달성해가며 착실하게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처음 목표는 1군 딱 한 타석만 하자 이거였어요. 2010년에 1군 데뷔전을 치렀는데 사직 두산전 왈론드가 투수였어요. 2빵(2타수 무안타) 먹었죠. 대기타석에 있을 때 너무 떨리는데 그때 (전)준우형이 '뭘 그렇게 긴장 하냐.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와라'라고 이야기 해주신 게 아직도 생생해요."
2012년은 정훈에게 뜻 깊은 해였다. 1군에서 78경기에 출전하며 백업 내야수 자리를 확실하게 굳힌 것이다. 비록 성적은 타율 2할 2홈런 12타점으로 두드러지지는 않았지만, 타격재능과 안정적인 수비로 점차 인정받았던 시기다. "1군에서 살아남으려고 정신없이 수비연습만 했어요. 내 수비가 불안하다고 느꼈거든요. 그런데 양승호 감독님이 지나가시면서 '훈아, 너 수비 안 불안해'라고 한 마디 해 주셨어요. 그 말 한 마디가 제게는 정말 큰 힘이 됐어요. 2012년에는 '내가 야구를 할 수 있겠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 "정말 탐났던 옆자리 근우형 골든글러브"
2013년, 정훈은 롯데 주전 2루수 자리를 꿰차면서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풀시즌을 치르며 규정타석을 채운 끝에 골든글러브 후보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비록 수상자는 정근우(한화)로 결정됐지만, 정훈도 얻은 게 적지 않았다.

사실 정훈은 골든글러브 시상식에 가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그러자 강민호가 "무조건 가라. 일단 한 번은 가봐야 한다"고 말했고, 이승화는 패션에 크게 관심이 없던 정훈 의상을 모두 맞춰주는 열정까지 보여줬다.
정훈은 "어차피 근우형이 받을 거 다 알고 있었다. 처음 그런 자리에 가보는데 경험이나 해보자 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갔었다"고 했다. 2루수 후보자들 중 정근우 성적이 가장 돋보이기도 했고, 당연히 '나는 받기 힘들 것 같다'라고 생각했기에 정훈 마음은 편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수상 발표를 앞두고 정훈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리고 내가 다 떨리더라고요. 괜히 근우형 이름이 불리니까 아쉽기도 하고…"
마침 정훈은 정근우 옆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골든글러브를 품에 안고서 돌아온 정근우는 그걸 정훈 바로 옆에다가 놔뒀다고 한다. "골든글러브 이름에 '2루수 정근우'라고 써있는데 그게 너무 탐나고 멋있고 부럽더라고요. 나도 언젠가는 저걸 타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기고요."
골든글러브 시상식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정훈은 강민호에게 "저 내년에는 진짜 열심히 야구 할거에요"라고 때 아닌 고백도 했다. 이렇게 정훈의 첫 골든글러브 시상식 참가는 끝이 났다.
▲ "올해는 주전 자리를 굳히겠다"
올 시즌을 앞두고 정훈은 최고의 컨디션을 뽐내고 있다. 코칭스태프와 동료 선수들은 '정말 좋아졌다'고 입을 모은다. 정훈은 "뭐가 크게 달라졌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지만, 1군에서 주전으로 뛴 경험은 그를 성장시켰다.
특히 정훈은 올해 큰 것 한 방을 치겠다는 욕심 대신 정확하게 치는 걸 목표로 삼았다. 과거 정훈은 삼진이 많은 편이었다. 프로통산 544타수에 삼진은 123개인 반면 볼넷은 37기에 불과하다. 그것도 37개 볼넷 중 작년에만 30개를 얻었다. 이에 대해 정훈은 "원래 덩치에 비해 치겠다는 욕심이 너무 많다. 매 타석 장타를 의식하게 크게 치거나 욕심을 부렸던 것 같다. 경기 흐름 상 주자를 모아야 할 때도 정작 타석에 들어가면 어깨에 힘이 들어갔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정훈은 올해는 방망이 무게를 줄이기로 했다. 가벼운 방망이로 정확한 타격을 해서 안타를 많이 치는 타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프리배팅에서 정훈은 오히려 작년보다 늘어난 비거리를 뽐내고 있다. 방망이 무게는 가벼워졌지만, 꾸준한 웨이트 트레이닝과 하체보강 운동을 병행한 덕분이다. 때문에 조성환은 올해 정훈을 보고 "어떻게 저 선수와 주전경쟁을 해서 이겨낼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까지 말한다.
먼 길을 돌아왔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정훈은 전혀 늦지 않았다. 숱한 시행착오를 통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까지 얻었다. 그의 올해 목표는 하나, 확실하게 1군에서 주전 자리를 굳히는 것이다. "1년 반짝 잘 했다는 소리 들을 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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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일본)=최규한 기자, dreamer@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