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아니 전세계의 관심을 모은 2014 소치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 경기가 방금 끝났습니다. 소냐 헤니와 카타리나 비트에 이어 올림픽 2연패에 도전하는 김연아(24)가 과연 러시아의 '신예' 율리아 리프니츠카야(16) 그리고 영원한 평행선 아사다 마오(24, 일본) 앞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모두의 관심이 쏠린 경기였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 김연아는 역시 독보적이었습니다. 20일(이하 한국시간) 러시아 소치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서 열린 쇼트프로그램 경기서 김연아는 기술점수(TES) 39.03점 예술점수(PCS) 35.89점을 받아 총점 74.92점을 기록하며 1위를 마크했습니다. 발등 부상을 이유로 올 시즌 그랑프리 시리즈에 나서지 않아 세계랭킹 29위였던 김연아는 3조 5번째, 전체 17번째라는 어정쩡한 순서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1위를 지킨 셈이죠.
오히려 당초 '도전자'로 떠올랐던 리프니츠카야와 아사다가 부진했습니다. 리프니츠카야는 마지막 트리플 플립에서 실수를 범하며 착지에서 넘어졌고, 아사다는 트리플 악셀의 악몽을 떨쳐내지 못했는데요. 자신에게 쏟아진 기대를 이겨내지 못한 두 사람은 각각 5위와 16위로 쇼트프로그램을 마무리하며 금메달 행보가 어두워졌습니다.

떨어진 선수가 있으면 치고 올라온 선수도 있는 법이죠. 리프니츠카야와 아사다의 자리를 대신한 이는 '러시아 신예 3인방' 중 한 명인 아델리나 소트니코바(18)와 베테랑이라 부를 수 있을 이탈리아의 카롤리나 코스트너(27)입니다. 소트니코바는 기술점수(TES) 39.09점 예술점수(PCS) 35.55점을 받아 총점 74.64점으로 김연아(74.92점)의 뒤를 이어 2위에 올랐고, 코스트너는 74.12점으로 3위에 올랐습니다. 두 선수 모두 예상 밖의 고득점입니다.
'복병' 소트니코바와 코스트너의 등장은 많은 이들을 당황시켰습니다. 특히 김연아의 연기가 끝나고 점수가 발표된 후 예상외로 '박한' 점수에 당황하던 이들은 소트니코바와 코스트너의 고득점을 이해할 수 없다는 평가를 내렸습니다. 정리하자면, 김연아의 점수는 너무 '짰고' 마지막 조에서 연기를 펼친 선수들의 점수, 특히 소트니코바의 점수는 '후했다'는 것입니다.
▲ 런던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 기억하시나요?
이쯤에서 문득 기시감이 들었습니다. 지난 해 3월 캐나다 런던에서 열린 2013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세계선수권대회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취재차 런던에 갔던 기자는 쇼트프로그램이 끝난 후 꼭 지금과 같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김연아는 그 대회에서 35명의 선수 중 14번째로 쇼트프로그램 경기를 치러 예상보다 낮은 69.97점의 점수를 받았습니다. 앞서 경기를 치른 선수들보다 월등히 높은 점수지만, 70점대 이상을 예상했던 취재진을 당혹스럽게 만든 점수기도 했습니다.
석연치 않은 롱에지 판정이 더해져 여러모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던 쇼트프로그램이었습니다. 취재기자들이 모여있던 프레스 센터가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외신 취재기자들도 김연아의 점수와 롱에지 판정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4, 5, 6그룹까지 남아있는 상황에서 김연아 이상의 점수를 받는 선수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전전긍긍하며 지켜봤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결국 김연아를 능가하는 선수는 없었습니다. 아사다는 당시도 쇼트프로그램에서 부진해 6위에 처졌고쇼트프로그램 2위를 기록한 코스트너도 김연아보다 3.11점 낮은 66.86점을 기록했습니다. 결국 35명 중 14번째로 경기를 펼친 김연아가 '기준'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공백 기간으로 인해 세계랭킹에서 밀린 김연아가 중간에서 경기를 치르면서 빚어진 혼선이라고 해야할까요.
이번 소치를 보면서 그 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김연아의 올 시즌은 지난 시즌과 판박이처럼 비슷합니다. 그랑프리 시리즈를 건너뛰고, B급 대회에서 우승으로 시즌을 시작한 후 전국종합선수권대회에서 리허설을 마치고 본 무대를 맞이했습니다. 2013년에는 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세계선수권대회였고, 2014년에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 소치동계올림픽이라는 점이 달랐죠.
아이러니컬하게도 두 대회에서 김연아가 뽑아든 프리스케이팅 경기의 순서도 같습니다. 2013년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 마지막 순서인 24번을 뽑았고, 1년 후 소치에서도 24번을 뽑아 마지막 순서로 무대에 나서게 됐습니다. 물론 김연아 본인은 가장 마지막에 연기를 펼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해왔지만,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순서이자 마지막 무대에 걸맞은 순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결과를 볼까요. 쇼트프로그램과 달리 마지막 순서에서 연기를 펼친 김연아는 전날의 혼란을 깔끔히 정리하며 무결점 클린 연기로 프리스케이팅서 148.34점의 고득점을 거둡니다. 자신이 2010 밴쿠버동계올림픽 때 세운 150.06점에 겨우 1.72점 뒤처지는 점수죠. 전날 받은 69.97점의 어정쩡한 점수를 완벽히 커버하고 남는 점수였습니다. 완벽한 연기를 펼친 여왕의 귀환에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응답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쇼트프로그램에서 소트니코바와 코스트너가 거둔 고득점은 김연아의 1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김연아가 프리스케이팅에서 실수라도 하나 한다면...' 하는 불안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과 1년 전, 비슷한 상황에서 보란 듯이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쥔 그가 기억에 남아있는 이상 김연아의 올림픽 2연패에는 아무 문제 없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소치에서 런던의 데자뷰를 느끼며, 지난 해와 같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 결말을 기다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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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러시아)=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