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점차로 쫓기고 있는 상황. 그런데 무사 1,2루의 추가 득점 기회를 잡은 상황. 타석에는 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타자. 벤치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갈 법한 가운데 SK의 선택은 번트였다. 결과적으로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승리에도 불구하고 미묘한 여운으로 남아 잠실구장을 휘감았다. 단순한 작전 실패가 아니었던 탓이다.
SK는 1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LG와의 경기에서 난타전을 펼친 끝에 13-8로 이겼다. 지난해 LG에게 약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첫 맞대결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모든 과정이 깔끔했던 것은 아니었다. 선발 조조 레이예스가 불안했고 불펜도 흔들렸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박희수까지 등판해야 했다. 3연전을 생각하면 그다지 좋지 않은 징조였다. 여기에 작전 미스도 있었다.
상황은 6-5로 앞선 6회였다. 6-2로 앞서 가다 LG에 추격을 허용하며 턱밑까지 쫓긴 시점이었다. 그런데 도망갈 기회가 왔다. 선두 김강민이 좌전 안타로 포문을 열었다. 후속 타자 조동화가 안전하게 희생번트를 댔는데 투수 신정락이 한 번 송구를 머뭇거리는 사이 발 빠른 조동화가 1루에서 살아 무사 1,2루 기회가 왔다. 상대의 추격 흐름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기회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기 타석에는 최근 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타자들인 최정 스캇 박정권이 줄줄이 들어설 기세였다. 최정도 30일 문학 넥센전에서 안타 2개를 신고하며 타격 컨디션을 끌어올리던 참이었다. 대량득점도 기대해볼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SK 벤치의 사인은 희생번트였다. 일반적으로 무사 1,2루에서 낼 수 있는 상식적인 작전이지만 타석에 최정이 있다는 점에서 의외였다.
최정은 지난해 희생번트를 딱 한 번 성공시켰다. 최정 타석 때는 번트 사인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날은 달랐고 최정은 희생번트를 침착하게 성공시킨 뒤 벤치로 돌아갔다. 결국 주자를 2,3루에 보낸 뒤 스캇과 박정권이 승부를 보겠다는 뜻이었는데 스캇이 내야 뜬공으로 물러났고 박정권의 사실상의 고의사구 뒤 이재원이 땅볼로 물러나면서 최정의 희생번트는 물거품이 됐다.
물론 결과론이다. 2루에는 발 빠른 조동화가 있었다. 병살의 가능성을 줄인 상황에서 안타 하나가 2점이었던 셈이다. 만약 타석에 최정이 아니었다면 거의 대부분의 벤치가 선택했을 법한 작전이었다. 하지만 최정이었기에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선택이었다. 여러 정황을 살펴봐도 최정은 그 상황에서 ‘약한 타자’가 아니었다.
최정은 지난해 신정락을 상대로 2할8푼6리(7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 그 2개의 안타 중 하나가 홈런이었다. 신정락 상대 통산 성적은 3할8리(13타수 4안타)로 평균 이상은 됐다. 언더핸드 투수를 상대로 한 2007년 이후 타율도 2할8푼2리였다. 왼손(.319)과 오른손(.294)에 비하면 타율이 떨어졌지만 ‘약하다’라는 느낌을 주는 유의미한 차이는 아니었다. 결과론적으로만 보자면, 이날도 9회 신정락과 비슷한 유형인 신승현을 상대로 안타를 때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1,2루 상황에서는 어땠을까. 최정은 지난해 주자 1,2루 상황에서 1할9푼4리를 기록했다. 6타점을 올렸지만 8개의 삼진을 당했고 병살타도 2개를 쳤다. SK 벤치가 이 데이터를 고려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2007년 이후로 범위를 넓혀보면 1,2루에서 2할8푼8리, 8홈런, 67타점으로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여기에 진루타율도 좋은 최정이다. 2007년 이후 총 1636타석에서 진루타율은 3할8리, 진루성공률은 45.84%였다. 요약하면 이 상황에서 아주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병살의 확률이나 최악의 상황이 나올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날 타격감을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다. 현장에서 보는 타격감은 일반 팬들이나 취재진이 보는 타격감과는 다르다. 분명히 더 정확하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최정이었다. 팀 타선의 최고 타자이자 자존심이다. 그런 요소를 고려하면 희생번트는 모든 이들의 예상을 뒤엎었다.
어쨌든 SK는 이날 승리를 거뒀고 6회 작전실패는 승리 뒤에 묻혔다. 하지만 최정에게 희생번트를 지시했고 이것이 끝내 실패했다는 것은 최정은 물론 전체 팀 분위기에 줄 영향이 가볍지 않다. “경기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라는 무언가의 의도를 전달했을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부작용도 고려할 수 있다. 이 경기는 한국시리즈 7차전이 아닌, 정규시즌 세 번째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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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실=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