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치 전이라면 바꿨겠죠. 하지만 이제는 안 바꿀 겁니다."
'6회 연속 올림픽 출전 기록과 메달을 바꿀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 이규혁(36, 서울시청)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한국 스피드 스케이팅의 '맏형' 이규혁이 은퇴식을 가졌다. 이규혁은 7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은퇴식을 갖고 국가대표로 활약했던 23년 동안의 세월에 마침표를 찍었다. 김진선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이에리사 국회의원, 김재열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및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전이경, 2014 소치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이상화, 박승희 등이 이날 은퇴식에 참석해 이규혁의 마지막을 함께했다.

이규혁의 국가대표 경력은 화려했다. 13세 때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발탁되어 올림픽 6회 연속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이규혁은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살아있는 역사' 그 자체였다. 특히 1997년(1000m)과 2001년(1500m) 각각 세계기록을 갈아치우며 빙속의 역사에 이름을 남겼고, 2003년과 2007년 아시안게임 2관왕, 세계 종목별 선수권대회 우승(1회), 세계 스프린트 선수권 대회 우승(4회) 등 국제대회에서 따낸 메달 개수는 30여 개에 달한다.
이규혁이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한 무대가 올림픽이다. 이규혁은 1994년 릴레함메르동계올림픽 이래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까지 태극마크를 달고 6번을 도전했으나 유독 올림픽에서만은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나 6번의 불굴의 도전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달리던 이규혁의 모습은 메달보다 값진 감동을 국민들에게 선사했다. 처음 스케이트를 신은 6세 이후, 30여 년의 시간을 빙판 위의 레이스에 바친 이규혁이 은퇴식에서 솔직히 털어놓은 이야기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 국가대표 은퇴 소감?
공식적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하는 자리다. 이 자리가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부족한 선수라 조졸하게 치를 줄 알았는데 몸둘 바 모르겠다.
▲ 소감을 이야기하다 울컥한 것 같다. 그 순간 심경은?
그냥 그 순간 애들이 많이 떠올랐다. 예전 영상들을 보는데 긴 머리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아, 내가 이럴 때가 있었구나' 싶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들의 아쉬움도 떠올랐다.
▲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아쉬운 순간을 꼽아달라면?
올림픽에서 실패할 때마다 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좌절감에 항상 슬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 때문에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대회가 특별히 생각난다기보다 오랜 시간 운동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쁨이다.
▲ 메달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렇다. 올림픽 메달이 없었기에 계속 운동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메달을 바라보며 4년을 준비해서 대회에 나갔다. 결과적으로는 메달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향후 계획은?
그동안 운동에만 너무 전념했던 것 같다. 다른 것은 못하고 살았다. 우선 가족과 시간 많이 보내고 싶고, 지금은 좀 쉬고 싶다. 모든 것을 내려놨기 때문에 누군가 이기려하지 않고 편하게 지내고 싶다. 이론적인 공부도 해서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때 후배들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돕고 싶은 마음도 있다.
▲ 지도자로 나설 생각이 있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빠른 시일 내에 대표팀 코치나 감독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국가대표로 오래 지냈기 때문에, 지금 이 느낌이 살아있을때 후배들에게 가능한 많이 전달해주고 싶어서다. 후배들이 평창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지도자를 해보고 싶다.
▲ 후배인 이상화나 모태범에게 조언할 것이 있다면?
상화나 태범이가 너무 잘하고 있어서 내가 조언할 입장이 아니다. 힘들게 운동한만큼 지금 많은 사랑 받고 있으니 즐겁게 운동했으면 좋겠다.
▲ 너무 어린 나이에 첫 올림픽을 나간 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그 때는 메달권에서 멀어졌지만 잘해야한다는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국가대표는 잘해야하는 자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 때 왜 그렇게 잘해야한다는 긴장감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 6회 연속 올림픽 출전기록과 올림픽 메달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는가?
소치 전에는 무조건 바꿨을 것이다. 하지만 소치 이후 메달의 의미가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메달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과정의 일부로 생각한다. 이제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 스스로 부족한 선수라 표현했는데 많은 분들이 자신에게 열광하는 원인은 뭐라 생각하는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안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고, 그런 모습을 반복하는 것이 공감을 얻지 않았을까. 예전에는 결과에만 집중했는데 이제는 과정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
▲ 국가대표를 이토록 오래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운동은 물론 힘들고, 스피드스케이팅은 운동량이 많은 스포츠다. 그러나 그 때문에 힘들다 생각해본 적은 없다. 이것만 버티면 우승한다는 희열이 있었고, 그런 희망에 차서 힘든 훈련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지난 시즌이 가장 힘들었다고 했는데?
한국에서 나이 많은 운동선수가 계속 운동을 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지난 시즌에 많이 알게 됐다. 나를 보는 시선도 곱지 않았고... 그럴 때 옆에서 후배들이 든든히 버텨줬다. (후배들에게 양보해야한다는 심적 부담이 있었나?) 후배 앞길 막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래도 스포츠는 정정당당하게 해야하는 것이고, 내가 실력이 조금 더 나았는데 나를 이겨서 나가야지, 양보한다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좋은 성적이 나오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당당하다. 요새 연맹(대한빙상경기연맹)이 비난을 많이 받는데 열심히 하시는 분들도 많고 덕분에 우리가 이런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고 생각해 안타까운 마음이 있다. 사실 섭섭한 부분은 많았다. 지난 해에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다.
▲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 나설 생각은 전혀 없나?
무리해서 욕심부리고 싶지 않다. 주어지면 하겠지만 억지로 만들어서 하지는 않을 것이다.
▲ 자신을 사랑해준 팬들에게 한 마디?
응원 많이 해주신덕분에 올림픽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응원받은 만큼 돌려드릴 수 있는 삶을 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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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형 기자 soul1014@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