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범경기까지만 해도 모든 이들의 우려를 샀던 브렛 필(30, KIA)가 보란 듯이 순항하고 있다. 완전히 다른 선수, 완전히 다른 방망이가 됐다. 계기가 있었다. 필에게 ‘필’을 불어넣은 마법은 다름 아닌 만루홈런 한 방이었다.
필은 올해 가세한 외국인 타자 9명 중 가장 돋보이는 성적을 내고 있다. 18일 현재 타율 3할7푼의 고감도 방망이를 뽐내며 리그 타격 4위에 올라있다. 외국인 타자 중 타율 2위인 에릭 테임즈(NC, .316)와 제법 격차가 있다. 정교한 것뿐만이 아니다. 홈런도 4개를 터뜨렸고 타점도 10개를 기록했다. 외국인 출전 규정에 따라 데니스 홀튼이 선발로 나서는 경우 벤치에 앉는 경우가 많은 필이기에 더 의미가 있는 성적이다.
사실 필은 마이너리그에서 더 이상 검증할 것이 없는 타자였다. 마이너리그 통산 888경기에서 타율 2할8푼5리, 113홈런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경력은 111경기에 머물렀지만 이 정도면 트리플A에서도 수준급 경력이었다. 그러나 큰 기대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시범경기까지 그랬다. 좀처럼 좋은 타구가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의 마음고생도 심했다.

당시 한 관계자는 “많이 괴로워한다. 숫자에 대한 부담감이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 타율, 홈런 등 숫자가 초라하니 스스로 제 몫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심했다는 뜻이다. 선동렬 KIA 감독도 “아무리 시범경기라고 하지만 성적이 나지 않으니 급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실제 필은 시범경기 10경기에서 타율이 1할2푼1리에 그쳤다. 홈런은 나올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필에게 반전의 계기가 된 경기가 있었으니 바로 3월 26일 광주-KIA 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한화와의 연습경기였다. 정규시즌 직전의 마지막 연습경기였는데 필은 이 경기 9회 마지막 타석에서 송창식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때리며 KIA 유니폼을 입고 첫 홈런을 신고했다. 이 짜릿한 그랜드슬램이 필의 어깨를 가볍게 한 것일까. 선동렬 감독은 “그때부터 필이 자신감을 찾았다고 하더라”라고 껄껄 웃었다.
그 후로는 승승장구였다. 타격감이 식지 않고 있다. 정교함과 장타력을 갖춘, KIA가 원했던 그 필의 모습이 나오고 있다. 필의 이런 모습에 기용법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선 감독은 16일 광주 한화전에서 선발 홀튼이 2이닝 만에 강판되자 마무리 어센시오 카드를 포기하고 필을 ‘추격의 선봉장’으로 투입시켰다. 필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질없는 가정이지만 만약 필이 당시 경기에서 홈런을 때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은 연습경기라 다른 선수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9회 이전 교체됐다면. 아마도 필의 타격감이 돌아오는 데는 좀 더 시간이 걸렸거나 여전히 어떤 계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신세였을 수도 있다. 만루포 한 방으로 다른 선수가 된 필의 사례는 ‘타이밍’이 투수와 타자 사이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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