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풍 ‘한공주’는 왜 까치발 소녀가 돼야 했나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04.28 15: 44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뒤늦게 영화 ‘한공주’(감독 이수진)를 보면서 ‘이거 괜히 봤다’ 싶었다. 러닝타임 내내 가슴에 무거운 바윗덩어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불편하고 착잡함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났을 때, 슬그머니 뒷걸음질 치고 싶은 못난 비겁함을 들킨 것 같은 죄의식이었다.
10년 전 밀양에서 벌어진 한 여중생의 집단 강간 사건을 뼈대로 한 ‘한공주’는 절제된 화면과 은유가 때로는 어떤 외침이나 직설 보다 더 큰 울림을 자아낼 수 있다는 걸 극명히 보여준다. 순제작비 3억원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영화가 해외에서 9관왕을 차지하고, 국내에서도 독립영화 기록을 깨며 돌풍의 주역이 된 건, 그만큼 많은 관객을 동의하게 하는 카타르시스 뇌관을 잘 장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연비 좋은 영화는 개봉 11일째인 28일, 14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공주’는 절대 먼저 흥분하거나 조급해하지 않고 시종일관 차분한 관찰자 시점으로 현실과 사투를 벌이는 여고생 공주(천우희)의 하루하루를 따라간다. 허진호 감독의 연출부 출신인 신예 이수진 감독은 감정을 최대한 아끼고 누르며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몰입도를 높이는데 효과적인지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적은 예산 탓이겠지만, 일체의 카메라 기교나 잔재주도 부리지 않는다. 그저 나침반을 보면서 정해진 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뿐, 한번 지나간 길을 뒤돌아보는 법도 좀처럼 없다.

엄청난 일을 겪은 뒤 인천의 한 여고로 도망가듯 전학 간 ‘인위적인 고아’ 공주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수영 강습이다. 불친절하지만 강사에게 배운 대로 ‘음파 음파’를 따라하며 물속에서 안간힘을 써보지만 손발은 물보라만 일으킬 뿐, 공주는 1미터도 전진하지 못하고 자맥질만 반복한다. 하지만 공주는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수영장에서 오로지 레인을 의지해 쉬지 않고 자유형에 매진한다. 감독은 수영과 그녀의 발버둥을 통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회귀하고 싶었을 공주의 간절함을 투영한다.
또 하나 이목을 끈 장면 중 하나는 공주가 전학을 가고 찜질방으로 몸을 숨길 때마다 끌고 다닌 싸구려 트렁크 신이었다. 지옥 같았을 사건 현장인 집에서 옷가지를 서둘러 챙겨 나온 공주는 새로 전학 간 학교 복도에서 덜덜덜 소음 심한 트렁크를 끌다가 담임에게 꾸지람을 듣는다. 시끄럽다는 손짓에 공주는 잽싸게 무거운 짐짝을 번쩍 들어 올린 뒤 담임 뒤를 따라 걷는다. 잘 못 한 게 없는 피해 소녀가 오히려 숨죽여 살아야 하고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까치발을 들어야 하는 이 장면이 엔딩 신 다음으로 가장 먹먹했다.
영화는 비록 디스토피아를 다루고 있지만 끝까지 희망의 끈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후반부엔 가혹한 현실과 ‘타협’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사과를 받고 ‘화해’할 순 있다는 유연함도 내비친다. 가족 해체와 학교, 기본적인 사회 안전망이 견고하지 못할 때 얼마나 많은 비극이 잉태되는지, 그리고 그 비극이 언젠가 부메랑이 돼 나와 우리 가족에게 돌아올 수 있는지, ‘한공주’는 조용히 옐로카드를 꺼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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