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월화드라마 ‘기황후’가 길고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역사 왜곡 논란을 안고 시작된 ‘기황후’는 속전속결로 마무리돼 아쉬움을 남겼지만, 배우들의 호연은 마지막까지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타환의 성장을 섬세하게 표현한 지창욱부터 첫 악역도 완벽하게 소화한 백진희 등은 물오른 연기력으로 재발견이란 찬사를 받았다.
# 지창욱. 28세 영민한 배우의 성장
'기황후'는 대원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고려 여인의 사랑과 투쟁을 다룬 작품으로, 지창욱은 극중 원나라 명종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권신들의 득세 속에서 황위를 동생에게 빼앗기고 고려의 대청도로 유배된 타환 역을 맡았다. 이렇다보니 극 초반 지창욱은 불안한 눈빛과 어리바리한 행동으로 언제 암살당할지 모르는 두려움을 표현하며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동생이 죽은 후 겨우 황제 자리에 올랐지만,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던 타환. 그는 원나라에서 재회한 승냥(하지원 분)을 사랑하며 진짜 황제로 성장하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아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장난기 가득한 타환을 연기함과 동시에 자신의 비참한 현실에 눈물짓고, 승냥이를 위해 듬작한 남자로 성장해 가는 모습을 애틋하게 그렸다.
지창욱의 영민한 연기에 매회 호평이 쏟아졌다. 특히 승냥이가 죽었다는 비보로 실어증에 걸린 타환의 모습은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삶의 의욕까지 상실한 남자의 공허함을 절절하게 담아내 보는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금세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표정과 온 몸으로 느껴지는 슬픔은 보는 이들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연철 일가가 제거되고 급전개로 이어진 5년 후. 광기어린 타환의 모습은 시청자들을 다소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지만, 지창욱의 물오른 연기력은 허점투성인 전개의 간극을 꽉꽉 메웠다. 또 지창욱은 마지막까지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에 충격을 받은 타환의 모습을 폭발적으로 담아내며 그 동안 쌓아온 연기 내공을 터뜨렸다.
지난 2006년 영화 ‘데이즈’를 통해 데뷔한 지창욱은 ‘2010년 ‘웃어라 동해야’를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그리고 2년 뒤 지창욱은 '다섯손가락'에서 질투와 열등감에 가득 찬 악역을 연기하며 이미지 반전을 꾀했다. 그의 연기변신은 성공적이었지만, 드라마가 아쉬운 시청률을 기록한 탓에 연기력은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다. 하지만 ‘기황후’를 통해 재발견된 지창욱은 20대 남자 배우 기근에 휩싸인 한국 연예계에 믿고 보는 배우로 우뚝 섰다.
# 진이한·조재윤·유인영, 1만 시간의 법칙을 증명하다
‘기황후’를 통해 진이한과 조재윤. 유인영도 큰 사랑을 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10년 이상 연기에 매진한 배우라는 것. 이들은 크고 작은 역할을 꾸준히 연기하며 내공을 쌓은 결과, 오랜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여실히 증명했다.
가장 먼저 진이한은 극 중 냉철하고 지적인 캐릭터 탈탈을 완벽하게 소화, 일명 '뇌가 섹시한 남자'의 대표주자로 나서며 여심을 단단히 사로잡았다. 신뢰 가는 중저음의 목소리와 매력적인 외모는 여성들의 탈탈앓이를 도왔다. 제갈공명을 연상케 하는 뛰어난 지략에 전술까지 능한 탈탈은 연철 일가가 제거 된 후 승냥이를 위협하는 최대 적이었으나, 승냥이가 위험에 빠질 때마다 든든한 조력자가 되며 키다리 아저씨를 꿈꾸는 여성들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충족시켜줬다.
무엇보다 진이한은 혜안이 밝은 군사 캐릭터를 세련되게 표현하며 탈탈의 절대적인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지난 2001년 뮤지컬 ‘UFO’를 데뷔한 진이한은 드라마 '왔어왔어 제대로 왔어' ‘애정만만세’ '닥터진'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필모그라피를 쌓았다. 이렇게 차곡차곡 다져온 연기력은 ‘기황후’를 통해 빛을 발하며 차기작 ‘개과천선’을 향한 기대감을 높였다.
배우 조재윤의 반전 연기도 눈에 띄었다. 극 중 타환을 보필하는 내시백 골타로 분한 조재윤은 드라마 초반까지 타환과 능청스러운 호흡을 선보이며 웃음을 선사했다. 또 허수아비 황제 노릇에 괴로워하는 타환을 위로하고, 승냥이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타환을 친구처럼 위로해 시청자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았다. 하지만 연철 일가가 제거된 후, 그에게 정치 자금을 댔던 매박상단의 정체가 수면 위로 드러나며 조재윤은 시청자를 큰 충격에 빠트렸다. 그가 원나라 상권을 쥐락펴락한 매박상단의 수령으로 드러났기 때문.
연철일가가 제거되기 전까지 골타의 이중생활에 대한 설명이나 묘사가 전혀 없었던터라 ‘매박상단 수령이 골타였다’는 사실은 긴장 유발을 위한 억지전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재윤은 싸늘한 무표정과 의뭉스러운 표정 연기로 속내를 알 수 없는 배신자 골타를 생생하게 표현하며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지난 2003년 영화 '영어 완전 정복'으로 데뷔한 조재윤 역시 차곡차곡 쌓은 내공이 뒤늦게 빛본 케이스로, 앞으로의 행보에 기대감을 높였다.
반면 유인영은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돌궐의 병사를 이끄는 바토루의 딸 연비수(유인영 분)로 분한 유인영은 많지 않은 분량에도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데 성공해 제작진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 결과 유인영은 데뷔 후 첫 사극 출연에도 불구, 연기호평을 받으며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넓히는데 성공했다.
안정적인 승마 실력과 함께 격한 액션신에도 흔들림 없이 사극의 고어체를 완벽하게 소화해 사극 진출의 발판을 마련한 것. 특히 유인영은 회를 거듭할수록 주진모를 향한 순애보 사랑을 애틋하게 그려내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현대극에서는 도도하고 세련된 연기를 선보였던 유인영. 그러나 '기황후'를 통해 사연 많은 남장여자를 능숙하게 연기하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데 성공했다. 작은 역할에도 빛난 연기생활 10년차의 내공은 1만 시간의 법칙을 외면하지 않았다.
# 백진희, 외모의 한계를 연기력으로 극복
배우 백진희는 드라마 중반까지 암투의 중심에 서며 순둥이 이미지를 완전히 벗었다. 단아하고 선한 외모로 그 동안 착한 캐릭터를 연기했던 백진희는 데뷔 후 처음으로 맡은 악녀 타나실리를 표독스럽게 연기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극 중 백진희가 연기한 타나실리는 원나라 최고의 명문가 딸로 절세미인이나 시기와 질투가 대단한 인물. 타환과 정략결혼한 후 후궁들이 후사를 갖지 못하도록 귀비탕을 내리고, 죽는 순간까지 승냥이를 향한 원망을 멈추지 않은 악녀 중에 악녀였다.
사실 백진희의 악녀 변신에는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우려도 있었다. 전작 '금 나와라 뚝딱'에서 보여준 현모양처 이미지, 막장 시월드에도 온화하게 미소를 짓던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말괄량이처럼 등장한 백진희는 어느새 독기 가득한 표정과 악에 받친 목소리로 악녀 타나실리를 완벽하게 표현하며 긴장감 넘치는 암투의 현장으로 시청자를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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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화면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