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설 곳 없는 사각의 링. 주어진 시간은 9분. 1라운드 3분씩 3번의 전투를 치르고 나면 숨은 턱까지 차오르고, 굵은 땀방울은 연신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국 복싱의 희망 한순철(30, 서울시청)이 다시 한 번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았다. 목표는 오직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이다. 16년 복싱 인생의 마지막 어퍼컷을 준비하고 있다.
한순철은 지난 2012 런던올림픽 남자 밴텀급(60kg이하)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행복의 연속이었다. 올림픽 전 미래를 약속했던 임연아(24)씨와 그해 백년가약을 맺었다. 프러포즈 선물은 은메달이었다. 이제 그의 주먹은 다시 아시안게임을 조준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태릉선수촌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한순철을 만났다.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벌써 2년여가 흘렀다. 런던의 영광스러운 기억은 또렸했다. "은메달을 땄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군문제도 걸려 있어 정말 깜깜했는데 은메달 덕분에 빛이 켜졌다."
영광을 맛보기까지 과정은 혹독했다. 환희와 좌절이 교차했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 은메달의 기쁨도 잠시 2008 베이징올림픽서 16강 탈락의 쓰디쓴 실패를 맛봤다. 절치부심했다.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부활의 신호탄이었다. 그리고 런던에서 그토록 간절했던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섰다.
복싱 선수로서 이룰 것은 모두 이뤘다. 어느덧 30줄에 접어들었다. 몸도 성치 않았다. 글러브를 내려놓을 만도 했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시상대 꼭대기 위에 서기 위해 다시 글러브를 꼈다. 한국 복싱 사상 처음으로 3개 대회 연속 아시안게임에 출전한다. 또 하나의 전무후무한 기록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아시안게임 은, 동을 획득한 한순철은 한국 복싱 최초로 금, 은, 동을 모두 노리고 있다.
"런던올림픽이 끝나고 몸이 안 좋아서 아예 운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눈에 아른거렸다. 인천에서 열리는 대회라 마지막으로 금메달을 꼭 따고 싶다."
한국 복싱은 지난 2002년 부산 대회 이후 아시안게임서 금맥을 캐지 못했다. 12년 만에 역사에 도전한다. "3번째 도전에서 유종의 미를 거뒀으면 좋겠다. 국내에서 열려 편안하기 보다는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부담감이 더 크다."

▲ 침체된 복싱인기와 바뀐 규정
어깨가 무겁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링에서 오래 벗어나 있었던 터라 감을 찾아야 한다. 선수촌에 들어온 지 2주 밖에 안됐다. 남은 기간 동안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한순철은 "대표팀 주장이자 최고참이다. 내가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어려운 것 같다(웃음). 대학생들과 나이 차이가 11살이나 난다"라고 미소를 지었다.
침체된 복싱 인기도 되살려야 한다. 한순철은 "복싱 인기가 떨어진 것에 대해 나만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니다. 감독님과 코치님을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선수들이 다 느끼고 있다. 복싱이 인기가 많아야 협찬을 받을 수 있는데 지금은 훈련복부터 미약한 실정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규정도 바뀌었다. 빠른 발과 펀치보다는 힘이 좋은 선수들에게 다소 유리해졌다. 헤드기어를 벗어 던지고, 기존 유효타에서 '얼마나 우세하게 경기를 펼치는가'로 평가 방식이 바뀌었다. 한순철은 "불리한 게 사실이다. 스트레이트가 강점이었는데 훅과 어퍼컷을 비롯해 파워 복싱을 주로 훈련하고 있다. 웨이트 트레이닝도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고 대비책을 밝혔다.
▲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대표팀 선후배로 동고동락했던 이옥성 코치는 든든한 스승으로 변신했다. "이옥성 코치님은 나보다 3살이 많다. 대표팀에서 한솥밥도 먹었고, 형이라 불렀었는데 지금은 다른 선수들 눈이 있으니 선생님이라 부른다(웃음). 둘이 있을 때는 정감 있게 대한다." 둘도 없는 선후배이자 사제지간이다.
세계선수권을 제패했던 이옥성 코치는 "순철이는 나에게 없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메달을 갖고 있다. 경험적인 부분에서 조언할 부분이 없다"면서 "다만 과거 내가 겪었던 일들을 얘기해주고 다독여주고 있다.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말해주면 스스로 잘한다"며 두터운 신뢰를 보냈다.
한순철에겐 절친한 후배이자 동료인 신종훈(25, 인천시청)도 있다. "후배 중엔 종훈이가 가장 친하다. 런던올림픽서 종훈이의 좌절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면서 정말 안쓰러웠다. 하지만 아직 젊다. 종훈이는 지금 내 첫 올림픽이었던 2008년 때와 비슷한 나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라고 말해준다. 이번에 꼭 금메달을 땄으면 좋겠다."
남자 복싱 대표팀은 오는 2일 독일로 한 달간 전지훈련을 떠난다. 이후 26일부터 독일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참가한다. 한국을 포함해 5개국이 참가한다. 인천에서 그려질 한순철의 금빛 펀치가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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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