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 와이번스의 이만수 감독은 평소 시카고 화이트삭스 시절 투수들의 이야기를 하면 당시 에이스였던 마크 벌리의 이름을 빼놓지 않는다.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던 시절에도 팀의 에이스는 벌리였다.
벌리는 이 감독에게만 최고의 투수로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꾸준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면, 벌리를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다. 벌리는 첫 풀타임 선발을 맡은 2001년부터 지난해까지 1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올해 역시 6경기에서 5승 1패, 평균자책점 2.25로 순항하고 있어 10승은 무난해 보인다.
20승은 한 차례도 없이 2002년 올린 19승이 개인 최다승인 벌리는 꾸준히 이닝을 소화하는 부분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다.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던 13년 동안 벌리는 매년 200이닝 이상을 소화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432경기에서 소화한 이닝이 무려 2871⅓이닝에 달한다. 경기당 평균으로 환산하면 6.65이닝이라는 놀라운 수치가 나온다.

벌리가 이렇게 꾸준한 모습으로 롱런할 수 있었던 것은 벽에 부딪히기 전에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 데뷔 초기 벌리는 포심 패스트볼을 60% 이상 던졌고, 커브와 체인지업 조합으로 배팅 타이밍을 흔들며 타자들을 상대했다. 19승을 올린 2002년의 포심 패스트볼 구사율은 62.5%였다.
하지만 구속을 보면 메이저리그의 유희관(두산 베어스)이라 할 정도로 빠르지는 않았다. 당시 벌리의 포심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86.6마일(139.4km)이었다. 140km를 상회하는 공도 있었지만, 젊은 시절에도 구위로 타자를 윽박지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구속이 크게 감소하지 않았고, 19승이나 올렸지만 벌리는 변화를 선택했다. 2003년에는 슬라이더를, 2004년에는 컷 패스트볼을 던지기 시작하며 벌리는 구종을 다양화했고, 이러한 변화 속에 한 번도 두 자릿수 승리와 200이닝 이상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의 벌리는 예전과는 또 다른 투수가 됐다. 이제는 평균 구속 130km 중반 수준이 된 포심 패스트볼 구사 비율은 40% 아래로 떨어졌고, 대신 체인지업의 비중이 늘어났다. 구속이 빠르지 않은 제이미 모이어 등의 투수들이 젊음을 잃은 대신 연륜을 쌓으면서 선택했던 방식이다. 슬라이더와 컷 패스트볼을 더 자주 섞어 예리하게 범타를 유도하는 것도 늘었다.
두려워하지 않고 매 시즌 조금씩 변화를 주는 벌리의 모습은 지금의 유희관이 배워야할 점이다. 유희관은 지난해 10승으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고도 좌타자 상대 승부에 있어 부족한 것을 느껴 포크볼을 개발했을 정도로 배움에 열심이다. 한국의 마크 벌리가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느린 구속뿐만 아니라 수비가 좋다는 점도 벌리와 유희관의 닮은 점이다. 둘 모두 투구 폼이 간결하고, 공을 놓은 뒤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이 수비에 좋은 영향을 준다. 벌리는 통산 4번의 골드글러브를 얻었고, 유희관은 스스로도 “야구 빼고 못하는 게 없다”고 말할 만큼 뛰어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무리 없는 수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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