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이재규 감독)이 평이 엇갈리는 속에서도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은 황금연휴를 접수한 흥행 왕이라는 것, 그 만큼 반응이 어찌됐든 영화 자체의 매력도가 상당하다는 것과 그 중심에는 현빈의 정조가 있다는 사실이다.
현빈은 시사회 후 영화에 대한 분분한 평가 속에서도 대부분의 호평을 이끌어냈다. 즉 군 제대 후 이 작품을 복귀작으로 선택한 현빈의 선택은 일단 옳았다.
정조를 연기한 사람은 현빈이 처음은 아니다. 최근만 살펴보면 '바람의 화원' 배수빈, '8일'의 김상중, '한성별곡'의 안내상, '이산'의 이서진이 있었고, 멀리 나가면 '영원한 제국'의 안성기가 있다. 최근에는 여진구가 내레이션을 맡은 조선역사 다큐멘터리 '의궤, 8일간의 축제 3D'가 나왔다.

그 만큼 한국인이라면 역사책을 잃지 않고도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정조다. 그 만큼 대중이 사랑하는 정조. 그간 이런 정조를 연기한 배우들이 대부분 연기력에서 인정받는 이들이기에 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 왕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음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충격적인 죽음을 목격한 아이. 언제 아버지처럼 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는 트라우마에서도 정조는 연산군 같은 행보를 걷지 않고 성군이 되고자 했다. 내, 외적으로 호기심을 일으키는 인물이기에 그 만큼 해석이 다양하고 드라마틱하다. '위태로우면서도 어진 왕'이 그간 작품들로 관객들을 만났던 정조의 이미지다.
현빈의 정조가 가장 먼저 화제를 모았던 것은 등근육이다. 잘 생긴 왕, 그리고 몸도 좋은 왕. 신경쇠약에 걸릴 만한 상황에서도 몸을 키워 지금까지의 정조에서 외면적으로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이에 일부에서는 정조에 대한 판타지를 투사한 것이란 말을 하기도.
하지만 영화 촬영시 관계자는 "영화 속 정조의 캐릭터가 몸을 잘 단련한 왕이다. 이는 실제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즉위 1년이란 배경에 아무래도 암살 위협을 당하는 왕이니만큼, 멘탈이 굉장히 힘들 때였을 것이다. 그런 예민한 상태에서 정조는 방 안에서 남이 보지 않을 때 운동을 하는 이중적인 왕이었다. 그런 정조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현빈이 노력을 많이 했다"라고 전했다.
정조의 잘 단련된 몸은 살수 못지 않게 무에 능한 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빈 정조는 지독하면서도 성실한 완벽주의자 타입으로 기회가 닿을 때까지 속내를 내보이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적을 한 방에 훅 가게 만드는 고도로 훈련된 스나이퍼와도 같다.
여기에 로맨티스트의 면모륻 더했다. 물론 로맨틱한 정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산'의 이서진이 대표적이었다. 극 중 정조가 아리따운 궁녀와 살짝 미묘한 핑크빛 기운을 내는 장면이 아주 잠깐 있는데, 이 부분에서 현빈의 전작 드라마 '시크릿 가든'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빈. 관객들의 웃음이 터지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관 상책(정재영)과의 브로맨스는 이 영화의 다른 큰 줄기가 된다.

하지만 영화의 성공을 위해서는 결정적인 '다른 면모'가 필요했다. 정조란 인물에 '지혜'를 입히는 방식이다.
임금으로서의 지혜는 사람을 다루는 것에서 나온다. 그는 상책이나 홍국영(박성웅) 같은 측근들의 절대적 충성을 받는 왕이나 그들에게도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적을 다루는 문제다. 예리하면서도 날카롭게 조선 군권을 휘어잡는 구선복 장군(송영창)을 회유하는 법, 자신에게 한 발을 내밀고 도발하는 정순왕후(한지민)의 목을 결정적인 순간에 죄는 법을 알았다.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살고 싶지 않았다"고 쓰면서도 영리한 계획자였던 그의 비범함에 놀라게 된다.
영화 속에서 되풀이되는 대사는 중용의 구절이다. 상책이 중용 23장 구절을 읊는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중용 23장)
정조는 살아남기 위해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한다. 그리고 이런 정조의 생존은 결국 세상을 변화시킨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모습들과 긴밀히 연관돼 현재를 반추하게 만든다. 영화 이후가 궁금한 인물은 정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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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스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