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토니 라루사 감독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시절 투수를 종종 8번 타순에 기용했다. 출루할 확률이 가장 낮은 투수를 8번에 넣어 중심타선과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었다.
라루사 감독은 “알버트 푸홀스 앞에 최대한 많은 주자를 놓아야 한다”는 말로 이러한 결정의 배경을 자주 설명했다. 세이버메트릭스를 연구하는 이들 중 일부는 주전 선수 중 가장 타격이 약한 선수가 8번 타순에 배치돼야 팀의 득점이 극대화된다고 주장하며 라루사 감독의 의견에 힘을 싣기도 한다.
최근 국내 프로야구에서도 이러한 움직임들이 보인다. 9번에 발이 빠른 선수를 배치해 9-1-2번으로 이어지는 ‘트리플 세터’를 활용하는 팀들이 많다. 두산 베어스의 경우 스피드를 갖춘 정수빈-민병헌-오재원을 붙여 기용해 큰 효과를 보고 있다.

반면 상대적으로 8번타자의 중요성은 쉽게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은 지명타자 제도를 활용하고 있어 투수가 방망이를 잡지는 않지만, 각 팀이 포수나 공격력이 비교적 약한 다른 포지션의 선수를 8번 타순에 투입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두산의 8번 김재호를 보면 이런 일반적인 통념과 거리가 멀다. 김재호가 8번으로 나오는 것은 출루가 뒷받침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팀 사정에 의한 것이다. 9-1-2번은 빠른 선수로 채운 두산의 경우 김현수-호르헤 칸투-홍성흔이 중심타선을 이루고 있고, 한 방을 갖춘 양의지와 이원석이 6, 7번에 포진한다.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인 김재호는 전술상 8번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절대 무시할 수는 없다. 최근 4경기 연속안타로 타율을 .260까지 끌어올린 김재호는 시즌 출루율이 .398로 4할에 육박한다. 108번의 타석에서 볼넷을 19개나 얻은 것이 높은 출루율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출루하지 못하는 타석에서도 많은 공을 보며 투수를 괴롭히는 것은 뛰어난 수비만큼이나 가치있는 김재호의 능력이다.
민병헌이 최근 4경기에서 8타점을 쓸어담은 것도 김재호의 출루가 밑바탕이 됐기에 가능했다. 이 4경기에서 9번 정수빈이 16타수 1안타로 부진했음에도 민병헌에게 많은 득점권 찬스가 간 것은 정수빈 앞에 위치한 김재호가 자주 1루를 밟았기 때문이다.
아직 이번 시즌 홈런이 하나도 없고, 통산 619경기에서 때린 홈런이 6개에 불과할 정도로 김재호는 장타 생산 능력이 뛰어난 편은 아니다. 그러나 대포가 많은 팀의 하위타선에서 방심한 투수들을 보이지 않게 코너로 몰아갈 수 있는 지뢰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김재호다.
본연의 임무인 유격수 수비에서 정상급 기량을 자랑하는 김재호는 타석은 물론 그라운드 밖에서도 주위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허리 통증으로 선발 라인업에서 빠질 때는 선수단에 피자를 돌려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하고, 국가적인 슬픔에는 누구보다 먼저 선뜻 거금을 내놓기도 했다.
시즌 초 극심한 타격부진을 겪을 때도 타율 대비 출루율만큼은 좋았던 김재호는 이제 타격감이 살아나며 출루율이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다. 2경기에 결장했고, 타순이 8번이라 김재호는 타석에 들어설 기회가 비교적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팀의 중심타자들을 제치고 볼넷 부문 8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것이 김재호의 가치를 잘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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