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4일의 기다림’ 허웅이 말하는 희망
OSEN 김태우 기자
발행 2014.05.09 06: 24

선발 출전을 통보받은 허웅(31, SK)의 머릿속에는 가족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구보다 이 날을 기다렸을 법한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혹시나’ 싶어서 집에는 알리지 않았다. 묵묵히 경기만 준비할 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석 한 켠에는 아내가 앉아 남편의 경기를 응원하고 있었다.
허웅은 “집에는 알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아내가 경기 전 선발 출전한다는 기사를 보고 경기장에 왔더라”라고 머리를 긁적였다. 너무 앞서나가다 행여 가족들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줄까 걱정한 남편. 그리고 그런 남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조용히 경기장을 찾은 아내. 그 장면을 떠올린 허웅은 “내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었다”고 살짝 웃었다. 지난 7일 SK와 삼성과의 경기가 열린 문학구장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지난 5일 1군 엔트리에 합류한 허웅은 7일 선발 포수로 윤희상과 호흡을 맞췄다. 주전 포수 정상호의 휴식 시간을 메우기 위한 출전이었다. 대체 요원에 가까웠지만 활약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투지 넘치는 모습으로 동료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공 하나하나를 받을 때마다 우렁찬 함성으로 투수들의 기를 살려줬다. 삼성 측에서 “타석에서는 좀 조용히 하라”라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삼성 측에서도 더 뭐라 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사연이 기구했기 때문이다. 허웅의 1군 출전은 지난 2011년 10월 6일 광주 KIA전 이후 처음이었다. 944일 만에 1군 무대에 다시 선 감격의 순간이었다. 공 하나하나에 혼신의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목소리도 커졌다. 허웅도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고 웃으며 뒤늦게 양해를 구했다.
944일이라는 세월의 무게가 허웅의 기구한 야구인생을 증명한다. 고교 시절까지만 해도 전국을 대표하는 포수 중 하나였던 허웅은 프로 데뷔 후 기회를 잡지 못했다. 현대에는 당대 최고의 포수들이었던 김동수 박경완이 있었다. 방출 당했고 군 복무도 현역으로 했다. 제대 후에는 개인 사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야구에 대한 꿈을 접을 수 없었고 테스트를 통해 2009년 SK에 입단했다. 하지만 박경완 정상호 조인성 이재원이라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포수들이 즐비한 SK에서도 기회는 마땅치 않았다. 2011년 27경기에 뛴 것이 1군 경력의 전부였다.
포기할까 생각도 많이 했다. 기나긴 2군 생활에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가족이 떠올랐다. 허웅은 “‘그만해야 하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가족이 있으니까 포기가 안 되더라. 안 될 때까지 해보고 다른 걸 해보자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까지 버텼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허웅은 “그렇지 않으면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어려운 길을 택한 까닭에 고생도 많이 했다. 하지만 동료들의 신망이 두터운 것은 허웅의 자세 때문이다. 올해 전지훈련 당시 조동화가 자신이 받은 두 차례의 경기 최우수선수 상금을 허웅에게 준 것은 상징적인 일화다. 조동화는 “허웅이 항상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몫을 잘 한다. 대인관계도 좋아 동료들의 기를 살려주는 데도 능하다. 그런 것이 기특했다”고 설명했다. 조동화의 마음 씀씀이도 빛나지만 그만큼 팀을 위해 헌신했던 허웅의 자세 또한 읽을 수 있는 일화다.
첫 경기에서의 평가는 아주 좋았다. 타격을 잘해서, 리드를 잘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기보다는 경기에 임하는 성실한 자세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만수 SK 감독은 8일 경기를 앞두고 “어제(7일) 하루만큼은 허웅이 최고의 포수였다”라고 했고 허웅의 미트를 향해 공을 던지며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 윤희상은 “투수를 참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이다. 100% 믿고 던졌다”라고 고마워했다. 허웅은 8일 경기에도 선발 포수로 나섰다.
물론 그렇다고 확고한 1군 선수가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전히 SK의 주전 포수는 정상호다. 부상 중인 조인성 또한 회복 되는대로 올라올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SK는 이재원이라는 미래의 포수를 키워야 하는 상황도 있다. 허웅도 이런 불안한 신분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주눅 들지 않는다. 허웅은 “어느 팀이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선수들은 있지 않겠는가. 언젠간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다잡는 것 같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SK 띠 전광판에 허웅을 소개하는 문구는 ‘7전8기’다. 이처럼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허웅은 다시 일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 선수다. 어쩌면 이런 투지와 각오는 최근 힘이 떨어지고 있는 SK 선수단 전체에 필요한 덕목일지도 모르겠다. 허웅의 ‘근성 바이러스’가 SK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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