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의 살수는 ‘납뜩이’ 조정석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캐릭터다. 이미 경력 10년차의 믿음직한 배우지만, 그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던 배역은 역시나 영화 ‘건축학개론’의 ‘납뜩이’였다. 이 강렬한 캐릭터는 꽤 오랫동안 배우의 뒤를 따라다니겠지만 그것이 그리 걱정이 되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하나의 캐릭터에 갇혀 있기엔 조정석이란 배우가 가진 내공의 뿌리가 단단하고 깊기 때문일 것이다.
흔히 배우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해 준 강렬한 캐릭터에 대해 감사함과 고민을 동시에 표하고는 한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게 해 준 캐릭터지만 동시에 너무 강한 여운으로 인해 한번쯤은 배우로서의 한계를 실감하게 하는 따뜻한 품이자 감옥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5일 OSEN과 만난 조정석은 “‘납뜩이’ 이미지가 주는 압박이 전혀 없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영화에 출연하기 전에도 공연을 10년 넘게 해왔어요. 많은 분들이 공연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잘 모르시지만, 공연을 하며 세상에서 누구보다 바람기가 넘치는 바람둥이도 해봤고, 여자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버릴 수 있는 인물도 해봤고, 까불대고 재밌고 유쾌한 역할도 했고, 열등감에 휩싸여 자살까지 가는 인물도 해봤죠. 다양한 역할을 했지만 그런 건 없었어요. 납뜩이 역할은 정말 재밌는 배역이었고, 잊지 못할 작품이에요. 그렇지만 그걸 깨고 싶어서 일부러 진중한 역할을 하고 이런 적은 없어요.”

조정석은 자신에게 전략적으로 어떤 배역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단지 시나리오를 “재밌다”고 느끼면 선택할 뿐이다. 물론 ‘재밌다’의 기준은 객관적이지 않다. 모든 사람들이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때 자신은 재미없다고 느낄 수 있고, 모두가 불완전한 영화라 할 때도 자신은 재밌는 어떤 것을 보고 선택할 수 있다.
“전략적으로 뭔가를 하고 안 하고는 저한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시나리오를 봤을 때 재밌고, 내가 그 속에서 뭔가를 할 수 있고 그런 부분을 보는 것뿐이죠. ‘관상’ 때 많은 분들이 조선판 ‘납뜩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만약, ‘납뜩이’ 이미지를 피하려고 일부러 고민했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저에겐 재밌는 게 중요해요. 그리고 그 재미의 기준은 본능적인 감이에요. 그런 면에서 제 자신의 선택을 믿어요.”

확실히 감이 좋은 배우인 게 맞다. ‘건축학개론’, ‘관상’ 모두 그 해의 흥행 성공작 리스트 최상위권에 자리를 잡았고, ‘역린’ 역시 개봉 후 3주간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영화에 대한 평은 조금 엇갈리지만, 많은 관객들이 현빈,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박성웅, 한지민, 김성령, 정은채 등 화려한 멀티 캐스팅 배우들의 하모니를 보기 위해 기꺼이 티켓 값을 지불한다. 그렇다면 조정석이 ‘역린’에서 매력을 느꼈던 포인트는 뭘까.
“정유역변, 단 하루, 그 시간동안 펼쳐지는 이야기가 얼마나 길겠어요? 그걸 압축 해놨고, 압축된 시나리오 안에 모든 인물들이 얽혀있어요. 그 구성 자체가 참 흥미로웠어요. 정유역변 자체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지 없었지만, 허구적 인물과 실존 인물들이 만나는 이야기, 정조와 상책 갑수, 그 이야기 끌어가는 사람들 간의 우정과 애환, 그런 것들이 너무 잘 보였어요. 을수 역 역시 갑수와의 관계, 을수가 갑수를 해할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이고 암울한 그 스토리텔링이 너무 재밌게 와 닿았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무래도 혹독한 추위, 그보다 더했던 액션 신과의 싸움이었다. 한겨울에 촬영이 진행된 탓에 많은 고생을 했다. 특히 마지막 정조를 습격하는 존현각 시퀀스에서는 한겨울에 물을 맞으며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액션 신을 소화하느라 큰 고생을 했다. 조정석은 “앞으로 6개월 간 액션 신은 못할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요. 이게 말할 정도의 증세인가, 이런 건 잘 모르겠지만…. 번지점프도 해봤고 해볼 만한 건 다 해봤어요. 단지 굉장히 무서워한 것뿐이에요.(웃음) 와이어를 뛰어 내린 장면이 있는데 와이어 액션 중에 가장 무서운 액션이었어요. 그 자리에서 그냥 뛰어내리는 거라 3-4m 자유낙하를 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떨어지기 전에 많이 무서웠어요.”
조정석이 맡은 역할은 특징 상 다른 배우와 붙는 신이 많지 않았다. 끊임없이 선배 배우들과 함께 하는 신이 많았던 ‘관상’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때문에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았다. 그렇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선·후배들과 함께 다니며 우정을 쌓을 기회가 많이 주어졌고, 이제는 너무 끈끈한 사이가 돼 버렸다고.

“또 다른 행복감이죠. 촬영을 하면 ‘관상’ 때는 항상 같이 하고 그런 데서 즐거움과 재미를 느꼈는데 이번엔 촬영이 끝난 다음에 어떻게 정말 많이 친해져서요. '으쌰으쌰'할 시간이 많이 주어졌어요. 형님들의 몫이 크죠. 재영이 형, 성웅이 형님, 두 분이 모임을 잘 이끌어주셔서요. 자주 만나기도 했고.”
'역린'은 엇갈린 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어떤 이들은 너무 많은 것을 담아냈다 아쉬움을 표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배우들의 연기 향연과 스토리 자체가 주는 재미에 대해 호평을 하기도 한다. 때문에 조정석은 "어떤 관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며 영화와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누구에게는 재밌고 누구는 재미없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 영화의 평이 호불호가 갈린다는 것에 대해서 전 '네버 마인드'하고 있어요.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습니다.(생략) 단, 우리 영화는 정말 '볼매'(볼수록 매력적인 영화)에요. 보면 볼수록 다르게 느껴지실 거예요. 더 보시다 보면 우리 영화가 재밌구나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아요."
영화가 끝나고 이제 쉴 법도 한데 조정석은 "연기가 너무 즐겁고 행복하다"며 쉬지 않을 것임을 알렸다.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는 것. 그러나 언젠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여행을 떠나는 게 작은 소원이다.
"힘들지 않아요. 다행인 건. 연습하는 게 힘들지 않고 너무 즐겁다는 거예요. 연기가 행복해요. 물론 휴식이 필요할 때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느낀다. 이건 체력적인 부분인 거고 정신적인 부분은 너무 좋으니까요. 만약 정말 체력적으로 쉬여야 할 순간이 오면 여행을 가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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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