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린’(이재규 감독)의 현빈에게 열광했던 건 등 근육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에 대한 평들은 엇갈렸지만, 현빈을 비롯해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등 주연 배우들에 대한 관객들의 평가는 후했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강점은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깊이 있는 캐릭터의 향연. 때문에 이를 연기한 배우들의 연기력과 호흡은 칭찬받을 만 했다.
그 중에서도 현빈은 영화가 그리고 있는 정유역변의 중심에 선 주인공 정조 역을 맡아 약 3년간 목말라 있던 연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역린’은 용의 가슴에 거꾸로 난 비늘이란 뜻으로 왕의 노여움, 혹 그를 노하게 하는 약점 등의 의미로 쓰인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역린’이란 제목의 의미에서 느껴지는 분위기와 사뭇 다르게 영화 속 정조는 분노를 크게 폭발시키거나 1차적인 감정으로 드러내지 않는단 점이다.
어쩌면 이는 ‘정조가 주인공이 맞느냐?’고 묻는 일부 관객들의 반응과도 일맥상통한다. 주변인들의 배신에, 신하들의 역모에도 감정적인 폭발 없이 침착하게 반응하는 정조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강한 ‘임팩트’를 발휘하는 살수(조정석 분)나 상책(정재영 분)에 비해 밋밋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정조이기에 영화의 감동이 커지는 것이 사실이다.

'역린'이 러닝 타임 내내 강조하는 것은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서 중용이다. 보통 중용이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으며, 지나침도 미치지 못함도 없는 떳떳함’을 의미한다. 또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중용의 23장의 핵심내용은 “작은 것에도 정성을 다하라, 그러면 변한다”이다.
영화는 줄곧 이 메시지에 충실한 정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정조가 분노하는 과정은 한순간의 감정 폭발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그는 감정의 폭발 대신 치밀한 대응책을 택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구선복 장군(송영창 분)을 한순간에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공격을 시작하는 살수들에 맞서 자신을 지킬 검객들을 준비해뒀고, 스스로도 편전으로 무장했다. 두려움이나 분노를 비치는 대신, 자신의 앞에 서있는 적들을 향해 차가운 눈빛으로 끝없이 활을 쏘는 정조의 모습, 이것이 영화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대변한다.
마지막에 이르러 정순왕후의 목숨을 살려주는 정조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할머니를 죽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보다 뒤에서 그의 숨통을 조르는 방법을 택했다. 뿐만 아니라 상책과 살수의 비극이 시작된 광백의 땅굴을 기습해 아이들을 모두 풀어준다. 과연 ‘중용’의 도를 '작은 것에도 정성을 다해' 실천하는 왕의 모습 다웠다.
이를 연기한 현빈 역시 '중용'의 도에 충실했다. 그는 정조의 모습을 영화의 메시지에 어울리게 잘 그려냈다. 극단적인 표현이 드러나지 않는 역이기에 오히려 섬세한 연기력이 돋보였다. 정순왕후를 대하는 눈빛에서는 긴장감이 묻어났고, 상책의 과거를 알게 된 후 그를 살려주고 내보내는 모습에서는 절제된 감정 속에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왕의 고뇌와 슬픔이 묻어나왔다. 어디 그 뿐인가. 정조의 '샌님' 이미지는 어디가고 항상 책을 읽는 모습과 함께 ‘등 근육’과 활로 대표되는 왕의 반전 육체미가 칼 같은 액션 연기로 드러났다. 때문에 현빈이 그린 정조에는 남다른 해석력과 이를 표현하는 깊이가 묻어났다.
여전히 ‘역린’은 ‘인간중독’, ‘고질라’ 등 복병들의 공격 속에서도 의연하게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역린’에서 살수 역으로 등장했던 배우 조정석은 최근 OSEN과 만난 자리에서 이 영화에 대해 “볼수록 매력이 있는 ‘볼매’ 영화”라 칭한 바 있다. 그의 말을 빌려보자면 ‘역린’은 볼수록 현빈을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가 새롭게 보이는 '볼매' 작품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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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