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칸)프랑스 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재수해서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건 현역 때보다 두세 배 더 험난한 길이다. 주위의 유혹도 많아지지만 무엇보다 한 번 경험해본 지긋지긋한 경로를 다시 가야 한다는 건 스무 살에겐 거의 도 닦는 경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수생과 당구를 쳐보면 십중팔구 물릴 가능성이 높다. 고작 1년 먼저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을 뿐이지만 그들은 절대 기분 내키는 대로 멋대로 큐대를 움직이지 않는다.
올해 칸에서 만난 한국 영화인들 중에는 공교롭게 패자부활전에서 기사회생한 사람들이 많다. 현지서도 유니크한 웰메이드 범죄 액션극으로 대접받은 감독주간 초청작 ‘끝까지 간다’의 김성훈 감독이 그렇고, ‘표적’으로 40대 여배우의 저력을 보여준 김성령이 그렇다. ‘도희야’로 주목할 만한 시선과 황금카메라상 후보에 오른 신예 정주리 감독도 빼놓으면 섭섭하다.
김성훈 감독은 지난 2006년 백윤식 봉태규 주연 ‘애정 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코미디로 데뷔해 주목받았지만, 두 번째 영화를 내놓기까지 무려 8년이 걸렸다. 당시 차승재 대표의 싸이더스HQ에 속해 참신한 소재 발굴과 기획력은 인정받았지만 차기작은 번번이 무산되며 메이저에서 차츰 멀어져 갔다.

말이 좋아 영화감독이지 투자 못 받고 출근할 영화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비자발적 실업 상태로 전환되는 게 이쪽의 냉혹한 현실이다. 칭얼대던 갓난아기가 잠들면 그때마다 노트북을 켜고 시나리오를 썼다는 김성훈 감독의 고백은 그가 얼마나 속으로 눈물을 삼켰을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본인은 극구 “친환경 때문”이라고 선을 긋지만 두 아이를 모두 천기저귀로 키웠다는 사실 역시 가벼운 주머니 사정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영화 개봉을 계기로 “직접세를 내는 감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드레스를 챙겨온 김성령도 역지사지 해보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드라마에서 부잣집 사모님 역할로만 섭외가 들어오다가 임팩트 있는 역할을 맡아 스크린으로 활동 반경을 넓힌 것도 감격스러울 텐데, 칸 뤼미에르 대극장의 레드카펫 초청이라니. 이 얼마나 천재일우 같은 기회일까 싶다. 인기가 꺾일 40대에 오히려 전성기를 맞았으니 페덱스로 드레스를 공수한다 해도 슬쩍 못 본 척 해줘야 할 것 같다.

김성령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감사한 일 뿐”이라며 “제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는지 중년 배우인 저한테 이렇게 좋은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며 칸 입성 소감을 밝혔다. 이 행복한 중년의 아이콘은 또 “이곳에서 장이모 감독 등 거장들과 해외 스타들의 레드카펫 행렬을 육안으로 보니 멋진 작품으로 다시 꼭 이곳을 찾아야겠다는 전의가 불타오른다”며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칸이 난생 첫 해외 여행지라는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도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영화인이다. 정 감독의 모교인 한예종 영상원과 CGV 무비꼴라쥬가 매년 산학협력 프로젝트로 시나리오 공모전을 여는데 ‘도희야’는 최종 결선에서 탈락한 작품이었다. 최종 후보 5작품 중 하나만 영화 제작비가 조달되는데 아쉽게 은메달에 그쳐 제작이 무산될 뻔 했던 것이다.
이때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가 바로 한예종 교수이자 시나리오 심사에 참여했던 이창동 감독이었다. 칸에서 만난 정주리 감독은 “이창동 감독님이 ‘참 아깝게 됐는데 이대로 버려지기엔 서로 아쉬우니 우리끼리 소박하게 제작해보자’고 하셨다. 그땐 정말 하늘에서 굵은 동아줄이 내려오는 기분이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그러면서 “2등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당시 수상작의 수준이 제가 봐도 월등했다. 심사는 공정했다”며 겸손함을 보이기도 했다.

칸에 오기 전 몇몇 신인 감독들과 소주를 마시다가 참으로 소름 돋는 얘기를 들었다. “기자님, 칸에 단골로 초대받는 유명한 한국 감독님들 계시잖아요. 그분들이 단체로 칸에 가는 비행기에 탄 겁니다. 그런데 기상악화로 항공기가 추락하면 한국 영화는 어떻게 될까요? 그래도 잘 돌아가겠죠?” 대기업의 관심과 투자 되는 배우들까지 독식하는 일부 스타 감독들에 대한 피해의식치곤 발언의 수위가 너무 세 가벼운 언쟁이 벌어졌지만, 상대적 박탈감의 정도가 엄청나다는 걸 새삼 일깨워준 자리였다.
배우들은 영화가 한두 번 망해도 개런티가 깎이지 않지만, 감독과 제작자는 한번만 실패하면 거의 월드컵에서 전국체전 수준으로 밀려나는 게 현실이다. 흥행 못 한 것도 서러운데 한물 간 감독 취급당하고, 기획력 없는 제작자로 낙인찍히는 게 오늘날 한국영화의 우울한 현주소다. 비루한 현실을 극복하고 천신만고 끝에 세컨드 찬스를 잡아 내로라하는 세계 영화인들이 모이는 칸에 입성한 한국 영화인들에게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을 루저라며 신세 한탄만 하는 사람은 영원히 루저로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패자부활전을 노리고 실력을 갈고 닦는다면 반드시 세컨드 찬스를 잡을 수 있다. 기회는 준비하는 자의 눈에만 보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힘들다는 건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또 다른 얘기다. 설사 칸의 초대장이 아니면 어떤가. 칸은 스케줄 소화나 근로 보단 돈 벌어서 아무 생각 없이 휴가차 오는 게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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