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이 필요있을까.
역사가 스포일러지만, 그 역사를 연기하는 배우들은 항상 놀라움을 전한다. KBS 1TV 대하사극 '정도전'(정현민 극본, 강병택 이재훈 연출) 얘기다.
24일 방송된 39회에서는 선죽교 사건, 즉 정몽주(임호)의 죽음이라는 굵직한 사건이 그려졌는데 이 과정에서 정몽주를 향한 애끓는 진심을 표현한 이성계(유동근)의 포효, 오랜 친구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정도전(조재현)의 오열, 대업 달성이라는 목표, 혹은 야망에 독단적으로 칼을 치켜든 이방원(안재모)의 모습이 그려졌다. 시청자들의 감정 몰입을 이끈 것은 역사를 알아도 재미있는 대본과 혼신을 다하는 배우들의 연기다. 시청자들은 "진짜가 나타났다"라며 감탄을 보냈다.

이날 누구보다 카리스마를 분출한 이는 이성계 역 유동근이다. 낙마사고로 몸져 누운 이성계는 가까스로 눈을 떴고 정몽주와 독대했다. 이성계에게 용상에 앉아있는 당신을 백성들이 왕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전했고, 이에도 이성계가 물러남이 없자 칼을 빼든 정몽주.
이 장면에서 유동근의 연기는 예측 불가, 혹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성계의 외침에는 노여움이 아니라 서운함과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존경하고, 함께 하고픈 이가 자신의 편에 서 주지 않자 분출하는 마음 속 슬픔은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할 정도였다.
이성계는 "이렇게 하면 정말 아이오다. 내 임금이 되면 배 내밀고 부귀영화 누리매! 남 짓밟을까봐 그러는 거우까? 아이다. 내사 임금이 되도 나랏일을 다 삼봉과 포은한테 맡길 거우다!! 두 사람이 하겠다면 무조건 밀어주고 방해하는 놈들 있으면 모조리 잡아놓고, 왜적놈들 깡그리 박살내고 내 그것만 할거다 말이오! 그렇게 하면 분명히 지금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내는 믿소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천벌받을 짓이오까?! 이렇게 간청하오다. 제발 함께 해주시오다. 삼봉 우리 셋이서 함께 좋은 세상을 맹글어보시자 마이오다"라고 소리쳤고, 이 장면에서 애원과 회환, 열정 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유동근의 연기가 압권이었다.
유동근이 불이라면 임호는 물이았다. 정몽주 역 임호는 끝까지 냉정함과 꼿꼿함을 유지하며 외유내강 정몽주를 완성시켰다. 그의 충절은 마음이 숙연해 지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방원에게 단심가를 적은 서찰을 전하고 선지교(선죽교)로 향한 정몽주는, 그 곳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을 맞딱뜨리고 말았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 죽어 고맙다고 전해달라"며 자신의 죽음이 조선 개국의 명분을 약하게 만들 것임을 예고했다.
임호는 기존에 봐 온 정몽주와는 또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역사를 되돌아보게 했다. 이성계에게 "못난 부모라 하여 외면한다면 그게 어찌하여 자식이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이성계의 마음을 흔들기도 했던 정몽주. 이성계가 너무나 탐을 냈던 외유내강형의 기개가 있는 단단한 캐릭터 정몽주는 임호를 통해 매력적인 캐릭터가 됐다. 더 이상 그에게 '왕 전문 배우'란 타이틀은 부족할 듯 하다.
조재현은 이날 이방원과 본격 대결을 펼치게 되는 지점을 연기했다. 정도전은 신념은 다르지만, 같이 뜻을 나눴던 오랜 벗인 정몽주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들의 손에 의해 철퇴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선지교로 달려가 오열했다. 생과 사의 구름다리를 넘고 살아난 정도전은 이 사건으로 이방원과 어긋나게 될 것이다. "대업을 위한 순교자가 될지언정 포은을 포기하지 않겠다"라며 이방원의 멱살을 잡았던 그다. 적이지만 친구였던 이의 마지막에 짙은 회환을 담았다.
이방원 역 안재모는 앞으로 '정도전'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인물이다. 선죽교 사건으로 정도전에게, 그리고 이성계에게도 실망을 안긴 야심가. 하지만 행동파이기도 했던 이방원은 조선 개국 이야기에 한 발짝 다가간 '정도전'이 앞으로 중요하게 다룰 인물이다. 안재모 역시 유동근, 조재현 등과 함께 어우러지며 밀리지 않는 연기 내공을 펼쳐보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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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