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이카로스 닮은 ‘회색 옴므’ 차승원에 다시 밑줄을 긋다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06.04 12: 21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있다면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각각 어느 행성 출신인 걸까. 명왕성일까 또는 토성일까? 그게 아니라면 화성에서 출발해 금성에서 스톱오버라도 한 것일까.
 영화 ‘하이힐’은 불행하게 지구에 불시착한, 뼛속 깊이 여자가 되고 싶었던 한 강력계 마초 형사의 고단한 행복 찾기 여정을 그린 일종의 성장 휴먼 드라마다. 느와르 앞에 감성이란 단어를 장착한 건 때리고 부수며 피 튀기는 액션을 담고 있지만,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데 더 가중치를 두겠다는 감독의 선전포고이며 이는 어느 정도 주효한 듯 보인다.
온 몸에 철심이 훈장처럼 박힌 강력반 에이스 형사 지욱(차승원)은 자기 안에 ‘또 다른 나’인 여자를 숨기고 산다. 밖에선 살벌하게 아드레날린을 내뿜으며 마초처럼 살지만, 집에선 가면을 벗고 네일아트 홈쇼핑을 틀어놓은 채 색조 화장을 하며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야누스적 인물이다.

사춘기 시절 동성에게 끌리는 자신을 혐오하며 열병을 앓다가 해병대에 입대한 지욱은 형사가 돼 조폭을 소탕하며 거칠게 살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에 대한 끌림을 떨쳐내지 못 하는 비루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칠수록 다시 원래 궤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 슬픈 뫼비우스의 띠는 마치 원심력과 구심력이 공존하는 것처럼 비생산적으로 지욱의 삶 속에서 반복된다.
 팔뚝에 시퍼런 멍이 가시지 않을 만큼 후미진 뒷골목에서 에스트로겐 호르몬 주사를 맞으며 정체성을 확인하던 그는 마침내 사표를 던지고 미국으로 가 전신 트랜스젠더 수술 수속을 밟게 된다. 아담즈 애플까지 제거할 수 있는 통장 잔액이 채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로서 마지막 임무를 수행하던 중 예기치 않은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자신이 지켜야 할 또 다른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이중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세상과 통념이 만들어놓은 금 밖으로 밀려난 잉여 인간 지욱은 과연 자신의 행복추구권을 방해하는 암흑 세력과의 목숨 건 사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동안 폐부를 찌르는 유머와 블랙 코미디로 필력과 연출력을 인정받아온 장진 감독은 20년 만의 첫 도전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만큼 제법 괜찮은 느와르를 빚어냈다. 감성 느와르라는 겉옷을 입고 있지만 알맹이는 장진 특유의 휴먼 드라마에 더 가깝다는 인상. 간혹 고개를 돌리고 싶을 만큼 잔인한 몇몇 장면은 눈에 거슬리지만 그가 왜 일찍 이런 장르를 넘보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내러티브와 만듦새가 정교했다. 마치 백일장에서 단골로 상을 받던 수줍은 작가 지망생이 체육대회에 나가 메달을 획득한 것 같은 반전이랄까.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감독 성향을 반영하게 돼있는데 중간 중간 전매특허 같은 장진 식 유머 코드도 빵 터지는 맛은 없지만 키득거리기에 나쁘지 않다. 예컨대 한밤중 용기를 내 풀 메이크업과 드레스, 하이힐까지 신고 엘리베이터를 탄 지욱이 곤경에 처하는 에피소드나 건달들이 형사 집을 압수수색하듯 뒤진 뒤 설거지까지 끝내놓고 집주인을 기다리는 주객전도 설정은 전형적인 장진 표 조크다. 트랜스젠더끼리 해병 기수를 따지고, 돈이 없어 하프 수술만 받은 횡성 한우 청년 같은 아이템은 이태원에서 건진 발바닥 취재의 수확물일 것이다.
 새끼손가락의 미세한 떨림과 심도 깊은 처연한 눈빛만으로 이도 저도 아닌 회색 지대 인간의 동요하는 심리를 표현해낸 차승원은 다시 한 번 진가를 발휘했다. ‘혈의 누’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 이어 보란 듯 자신을 한 단계 뛰어넘었고 그의 이름에 다시 굵은 밑줄을 긋게 만드는 놀라운 집중력과 서늘함을 맛보게 해준다.
 특히 조물주가 창조한 대로 살지 못하고 신의 등 뒤에서 숨죽여 살아야 하는 성적 소수자의 처량함을 보여주는 교회 독백 신과 거울 앞에서 자신을 경멸하다가 자해하는 장면은 모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진 명장면 중 하나였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이카로스의 슬픈 비상을 그렸지만, 과한 감상에 갇히지 않고 싸구려 동정을 구걸하지 않는 연출 태도 역시 남달랐다. 청소년 관람 불가. 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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