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얼마 전 한 작가에게 배우들의 활동 빈도와 관련한 흥미로운 비유 한 토막을 들었다. 이른바 옹달샘 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배우들은 각자 자신만의 비밀스런 옹달샘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재밌는 건 물 떨어지는 속도가 모두 제각각이라는 사실이다. 바가지에 물이 빨리 채워지는 배우는 그만큼 보여줄 게 많아 왕성하게 활동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잦은 차기작 불발에 시달리며 본의 아니게 오랜 기간 쉴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다.
“그럼 송강호와 하정우는 양수기 배우냐”는 농담으로 웃어 넘겼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배우들의 활동량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건 무엇보다 수요와 공급 법칙일 것이다. 최민식 송강호 전도연처럼 이른바 구매력 있는 배우들은 흥행 감독과 시나리오가 사시사철 대기하고 있어 들어온 책 중 가장 꽂히는 걸 고르기만 하면 된다. 루저들이 볼 땐 야속한 승자독식이겠지만, 자본주의 속성이 원래 그렇다.
실제로 ‘친절한 금자씨’ 이후 5년간 스크린을 떠나있었던 최민식은 ‘악마를 보았다’ ‘범죄와의 전쟁’으로 귀환한 뒤 ‘신세계’에 이어 블록버스터 ‘명량’까지 쉴 틈 없이 야전 생활을 자청했다. 좀 쉴 법도 한데 송강호도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에 이어 이준익 감독의 ‘사도’까지 놀라운 폐활량을 과시하고 있다. 이 분야의 최고봉은 단연 하정우다. 그는 2008년 ‘추격자’ 이후 연평균 2.5편의 주연작을 내놓으며 소비자들의 기대치까지 만족시키는 대식가 면모를 보여준다. 연출까지 겸하는 ‘허삼관 매혈기’ 이후엔 쇼박스 최동훈 감독과 벌써 부킹이 돼있다.

이렇게 실력파 배우들이 쉬지 않고 촬영장을 지키면 영화계와 극장, 관객 모두 이롭다. 투자가 활발해지고 볼만한 영화가 꾸준히 극장에 걸리면, 관객 만족도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배우들의 왕성한 회전율이 끊임없이 그들을 자극하는 주변 인맥 덕분이라는 목소리도 있다. 기획 단계부터 친구인 송강호 출연을 염두에 둔 최재원 대표의 ‘변호인’이 그렇고, 최민식 황정민과 호형호제하는 ‘신세계’ ‘무뢰한’ 제작자 한재덕 프로듀서가 그렇다. ‘댄싱퀸’ ‘국제시장’에 이어 ‘히말라야’까지 함께 하는 윤제균 감독과 황정민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친분이 이 모든 걸 설명하지는 못 한다. 매의 눈과 예지력을 갖춘 배우들이 단순히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스케줄을 빼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너무 낭만적인 발상이다. 오히려 이들이 피로감에도 불구하고 회전율을 높이는 건 감가상각을 최소화하겠다는 배우로서의 사명감과 욕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정우는 언젠가 “서른, 서른 한 살의 제 모습을 필름에 차곡차곡 담아두고 싶어 일했는데 그게 쌓여 다작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얼마나 무섭고 멋진 자신감인가.
적어도 이들에게는 ‘흥행 안 되면 어쩌지’ ‘악역 때문에 광고 끊기면 곤란한데’ 같은 걱정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지금껏 도전하지 않았던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하며 스스로 희열을 느끼고, 때론 낙담도 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치를 넘는 데에만 관심을 보인다. ‘관상’으로 흥행한 송강호가 예상을 깨고 다시 사극을 차기작으로 정한 것도 뭔가 이 장르에서 갈증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찾아온 매너리즘과 슬럼프도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보약이 됐다. 승승장구하던 송강호는 ‘타짜’ 김윤석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았고 ‘하울링’ ‘푸른소금’의 잇따른 흥행 실패도 경험했다. 황정민 역시 자신을 발굴해준 매니저와 결별한 뒤 인생 쓴맛을 봐야했고, 무명시절 하정우도 역할에 어울리는 분장과 의상까지 갖추고 오디션을 봤지만 100번도 넘게 낙방하며 낭중지추의 칼을 갈아야 했다. 실업을 경험한 재취업자는 회사가 일을 많이 시킨다고 투정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몇 년째 ‘시나리오 검토 중’인 배우들도 저마다 사정이 있을 것이다. 원하는 작품이 안 보일 수 있고, 40% 가까운 소득세도 짜증날 수 있다. 아니면 옹달샘의 물이 아직 덜 채워져 연기력이 뽀록날까 두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건 자신이 망각된다는 기회비용 보다 자기도 모르게 배우로서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자들이 왜 0.1%의 수익률에 벌벌 떠는지 아는가. 바로 인플레이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떨어지는 화폐 가치의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서민보다 더 잔돈에 연연하는 것이다.
송강호 하정우도 사람인데 그들이라고 해운대 바캉스를 싫어할까. 그렇지 않다. 그들이 나태해지려는 자신에게 회초리를 들며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자존감이 누구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 자신의 연기적 단점을 엄격하게 캐치하고, 남들 모르게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옹달샘을 들락거릴 것이다. 그들의 회전율이 착한 식당의 테이블 회전율만큼이나 반가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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