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괴담’ 골목 상권 지키는 리틀빅 배급 시스템 안착할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06.17 14: 25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요즘 순제작비 10억 원 안팎의 저예산 공포 영화 한 편에 영화 종사자들의 시선이 몰리고 있다. 특히 CJ엔터테인먼트와 롯데, 쇼박스 등 빅3로 불리는 대기업 투자배급사 임직원들의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마스크 귀신을 소재로 한 ‘소녀괴담’(오인천 감독)이 그 주인공이다. 자신들의 유통망을 거치지 않은 새로운 배급사의 첫 작품 출현에 요즘 대기업 배급팀이 분주해졌다.
‘소녀괴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출자해 만든 투자배급사 리틀빅픽쳐스의 1호 영화다. ‘코르셋’ ‘접속’ ‘건축학개론’ 등 한결같이 양질의 영화를 만들어온 명필름과 ‘괴물’ ‘26년’의 제작사 청어람, ‘아내가 결혼했다’ ‘두개의 달’ ‘관상’을 만든 주피터필름 등이 뜻을 모았다. 그동안 싸이더스FNH 차승재 대표와 명필름 이은 심재명 대표가 자체 배급사 설립에 나선 적은 있지만, 이렇게 제작사들이 연합해 배급사를 발족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단합 안 되기로 유명한 영화 제작자들이 모처럼 중지를 모아 배급사를 설립한 이유는 간단하다. 더 이상 대기업에 휘둘리지 않고 영화 제작에 전념하고 싶다는 의지 표명이다. 대기업 투자를 못 받으면 사실상 영화 제작을 포기해야 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제작사와 프로듀서들이 영화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생태계 정화 취지도 담겨있다. 또한 가격 결정권이 없어 그간 대기업에 꼬박꼬박 지불해온 배급 수수료를 아껴 제작비에 선용하자는 뜻도 감춰져 있다. 궁극적으론 자신들의 저작권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창작자들의 숙원도 작용했을 것이다.

‘리틀빅’이라는 이름도 뜯어볼수록 의미심장하다. 작지만 크다는 뜻의 형용모순으로 혼자일 땐 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함께하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았다. 한때 영화계 거물로 불린 차승재와 이은, 최용배, 정훈탁 대표 등이 야심차게 자체 배급사를 만들었지만, 몇 년 못 가 문을 닫아야 했던 이유는 아무리 용을 써도 대기업의 자본과 견고한 시스템에 부딪쳐 각개 격파됐기 때문이다. 매년 10여 편의 개봉작을 꾸준히 내놓는 일도 물리적으로 힘에 부쳤지만 무엇보다 대기업이 소유한 멀티플렉스의 텃세가 이들을 낙담하게 만들었다.
나름 끗발 있다고 알려진 영화인들의 배급사가 하나 둘씩 백기 투항하자 대기업은 그때마다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배급 수수료를 인상했고 현재 10%까지 도달했다. 9000원을 내고 영화 티켓을 끊으면 900원을 투자배급사가 떼어가는 구조다. 대기업 국내 배급팀 직원이 고작 10명 남짓인데 이들이 앉아서 버는 1인당 매출액이 연간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극장 내 상영작의 홍보 전단지를 배치하고 예고편을 관리하는 단순 업무치곤 꽤나 비싼 유통마진이라 제작자들의 원성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비용 중 하나다.
현재 리틀빅 배급팀은 쇼박스와 CGV, 디지털시네마 출신 경력 직원들로 구성됐고 이들은 ‘소녀괴담’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 한 달 째 전국 극장을 돌며 세일즈 중이다. 한때 같은 회사 동료 선후배였을 극장 점주와 프로그래머, 매니저들을 만나 “소녀괴담 무섭게 잘 나왔으니 애정을 갖고 걸어달라”며 발품을 팔고 있는 것이다. 뉴욕과 파리에서 영화를 공부한 유학파 배급팀 두 여직원들도 락스 냄새 나는 모텔에서 토막잠을 자며 장기 출장중이라고 한다.
리틀빅의 성공 여부가 비단 ‘소녀괴담’ 한 편의 흥행으로 좌우되진 않을 것이다. 리틀빅의 출현은 많은 제작자들이 더는 밀려날 곳이 없다는 처절함과 절박함에서 나온 고육지책일 거라는 생각이다. 일부의 얘기겠지만, 여전히 대기업 투자사가 시나리오 회의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힘없는 제작사의 지분을 탐하고, 이도 모자라 많은 감독들을 직거래로 계약하며 제작사를 고사시키고 있는 게 냉혹한 현실이다. 투자 리스크를 관리한다며 제작사에 금융비용을 물리는 대기업도 있다. 제작과 투자에 칸막이를 두고 있는 선진국에서 보면 이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약육강식 수익모델도 드물 것이다.
‘소녀괴담’의 예상 손익분기점은 50만 명이며, 이들의 1차 목표는 100만 돌파라고 한다. ‘트랜스포머’가 한 바탕 극장을 쓸고 간 뒤인 7월초 ‘신의 한수’ ‘좋은 친구들’과의 경쟁이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의 쓰리 콤보 부진과 ‘끝까지 간다’의 뒷심을 보면 관객들이 얼마나 무섭고 정확한지 제작자들은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소녀괴담’의 흥행 여부 역시 당위나 주변 상황이 아닌, 얼마나 좋은 컨텐츠를 담았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제작자들의 골목 상권 지키기가 이제라도 좋은 결실을 맺게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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