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액션의 조합이라니, 흥미로운 소재에 오랜만에 악역 다운 악역이 나타났다. 영화 '신의 한 수'(조범구 감독)에서 절대 악 살수 캐릭터를 연기한 이범수는 관객에게 동정이나 공감을 구하지 않는다. 요즘처럼 '착한 척 하는 악역'이 유행처럼 많은 작품에서 뼛속까지 이유없이 못된 인물이기에 캐릭터적으로 더 강렬함을 선사한다.
'신의 한 수'는 범죄로 변해버린 내기바둑판의 이야기를 다룬 이 액션물. 살수는 주인공 태석(정우성)과 대립각을 세운다. 캐릭터 설명 자체가 '절대 악'이다.
쉽게 간파할 수 없는 표정에 발가벗은 몸은 전신 문신이 휘감고 있다. 살수가 이런 뜨악한 문신을 한 누드로 등장하는 사우나신은 영화 속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다. 이 문신은 본인이 직접 제안한 것이기도 하다. 사우나 실에서 인물이 나오는 것임과 더불어 살수라는 절대 악의 캐릭터를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생각하다가 '보기만 해도 싫은 느낌'의 것을 생각했다고.

"외형적으로 살수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했어요. 평소엔 깔끔하고 먼지 하나 안 묻을 것처럼 깨끗한 사람, 그 만큼 예민한 인물이 알고보니 전신 문신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외형을 한꺼풀 벗겨내니 '아 알고보니 저런 애구나' 라는 게 확 오는거죠. 겉 모습과 다른 어마무시한 전신 문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질 것이라 생각했어요. 살수의 '안경' 같은 것도, 액션을 하는데 목숨을 해하고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안경을 쓰고 싸운다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본인에게는 일종의 자신감이죠. 차가운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유리를 움켜잡는 거, 생각만 해도 불쾌하지 않나요?"
영화 속 살수와 홍일점 배꼽(이시영)의 관계는 그 표현에 있어 담백하고 절제돼 있어 더욱 여운을 남긴다. 휴대폰으로 배꼽과 태석(정우성)의 스킨십을 보는 살수의 눈은 번쩍거리나 특별한 표정 변화는 없다. 살수가 사우나에서 나와 배꼽과 나누는 대사와 그의 행동은 이들의 관계를 1차원적이지 않게 보여준다. '이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있구나.' 이런 영화의 면모가 살수란 캐릭터와 닮아있다.
영화는 바둑의 세계관에 액션의 외피를 입었다. 그 만큼 액션는 영화의 큰 축이다. 기자간담회에서 키 차이가 나는 정우성과의 액션 합을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렇죠. 정우성과 키가 다른데, 전 오히려 비슷비슷한 사람이 부딪힐 때보다 충격이나 호기심이 더 클 거라고 생각했어요. 살수와 태석의 외형이 부딪힐 때 기대되는 긴장감이 더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크고 힘 있는 자와 무척 빠른 자와의 대결이죠. 힘 있는 자와 힘 있는 자, 빠른 자와 빠른 자의 대결이면 이처럼 흥미를 느끼진 못했을 거예요. 영화 '트로이'에서 병사들 대표로 가장 잘 싸우는 사람을 부를 때 거구의 무사가 자고 있는 남자를 깨우죠. 그게 브래드 피트고요. 상대가 힘으로 제압하려고 하는데 브래드 피트는 그걸 빠르게 빠져 나가요. 그런 느낌이었어요."

이처럼 빠른 느낌의 액션을 보여주고자 한 이범수는 촬영 중 새끼 손가락이 골절되기도 했다. 하지만 티를 내거나 아프니까 나중에 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게 프로의 세계니까. "다행히 세트 촬영을 마지막 날 아침에 다쳤어요. 하하. 마지막날이라 다행이었습니다. 몇 신 안 남았으니까."
다른 한 축은 바둑이다. '패착-착수-포석-행마-단수-회도리치기-곤마-사활-계가' 챕터로 이뤄진 영화는 바둑에 대한 호기심과 어쩌면 그에 대한 동경까지도 이끌어낸다. 조범구 감독은 이범수가 바둑알을 내려놓는 연기를 극찬한 바 있다. 이에 이범수의 눈이 반짝였다.
"바둑을 내려놓는 동작이 우아하고 맵시가 있어 보이더라고요. 마치 무형의 동작, 하나의 선 같은 미사어구가 떠오르고요. 선의 느낌이랄까. 간드러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는 '너의 목숨을 끊겠다'예요. 어마어마하지 않나요? 그런 거에 있어서 이질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이 영화를 위해 바둑을 배웠냐고 물었다. 이어진 그의 대답. "사실 바둑을 배운다는 게 막연했어요. 배우는 게 아니라 계속 두는 것이더라고요(웃음)."
바둑과 액션의 조합은 본인에게도 신선했다. 그는 "바둑과 액션이 과연 만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낚시와 액션이 만나면 좀 새롭지 않겠나? 혹은 요리와 액션(웃음). 그런 느낌이여서 의문이 들었는데시나리오를 한 장 넘기고 나니까 되겠구나, 싶었다. 확신을 얻었다"라며 시나리오를 읽고 단 번에 영화를 선택했음을 알렸다.
자식이 있는 부모 배우로서 그 역시도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라고 전했다. "흥행을 크게 하고 부끄러운 것 보다 흥행은 안 되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영화를 찍고 싶은 게 진심이에요." '신의 한수' 역시? 그의 대답은 '물론'이다.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물었다. 베테랑인 그도 고민이 많았다. 바둑과 비교해 설명해달라는 주문을 더했다.
"저 역시 '현재 나한테 어떤 패가 필요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해요. 사람들이 늘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하는 건 좋은거죠. 반면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도 역시 좋은 거고요. 하지만 결과론적으로 새로운 도전이 뒤틀리면 무모하다고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하던 일을 꾸준히 잘 하면 본연의 위치에서 충실하다는 말을 해요. 늘 잘 할 수 있는 것에 충실하려고 하면서도 정체되지 않는, 또 다른 도약을 꿈꿉니다." 앞으로도 많은 연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이유는 '너무 너무 연기를 좋아하고 재미있으니까.'
"제게 연기는 취미이자 오락이예요. 전 특별한 취미도 필요 없어요. 연기가 재미있으니까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 같아요. 백발의 꼬부랑 노인이 되더라도 연기를 하고 싶어요. 개런티를 받아 그 돈을 후배들한테 전부 다 쓰더라도 이 일을 할거예요. (이번 영화에서 함께 호흡한) 안성기 선배님처럼 명성이 오래 계속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에요. 얻는 것 만큼 힘든 게 유지하는 거죠."
정우성, 이범수, 안성기, 안길강, 김인권, 이시영, 최진혁, 이도경 등 출연. 청소년 관람불가. 3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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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철 기자 baik@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