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평화는 깨졌다’ 할리우드 SF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의 메인 포스터 정중앙에 새겨진 헤드 카피다. 인간의 탐욕과 오만에 반기를 든 성난 침팬지들의 선전포고를 함축한 이 카피를 바라보는 한국 영화인들의 표정이 요즘 부쩍 어두워졌다. 마치 자신들을 향한 경고와 날카로운 송곳니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발단은 이 영화의 수입사 이십세기폭스코리아가 당초 확정했던 한국 개봉일(7월16일)을 일주일이나 앞당기기로 결정하면서다.
열혈 팬들 뿐 아니라 전편 보다 오락성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혹성탈출’을 기다려온 예비 관객들 입장에선 당겨진 개봉 뉴스가 반가울 것이다. 유료 시사와 전야 개봉 등 온갖 명목으로 개봉을 하루 이틀 앞당겨온 전례도 수없이 많이 봤기 때문에 이번 ‘혹성탈출’의 조기 개봉 역시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막바지 CG 작업과 국내 심의가 신속하게 통과됐고, 무엇보다 한미 동시 개봉을 맞추기 위해서라는 수입사의 해명도 거짓일 리 없다.
하지만 ‘혹성탈출’의 개봉일 ‘단순 변심’이 결과적으로 명백한 반칙이 된 이유는, 이 영화를 피해가기 위해 배급 전략을 짰던 몇몇 한국 영화에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게 됐기 때문이다. 가장 큰 타격을 보게 된 불운의 영화는 ‘혹성탈출’과 같은 날 맞붙게 된 ‘좋은 친구들’이며, 3일 개봉한 ‘신의 한 수’와 ‘소녀괴담’ 역시 할리우드 발 허리케인의 영향권에 휘말리게 됐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촌스럽게 애국심에 호소하느냐’ ‘기껏 외화 한 편 때문에 한국 영화가 휘청대겠느냐’ 같은 목소리도 한편으론 타당하다. 스크린쿼터라는 보호막이 사라진 뒤 한국 영화의 고전이 예상됐지만, 한국 영화인들의 풍부한 자원과 독창성, 여기에 관객의 화답이 이어지며 몰라보게 체력이 좋아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할리우드 대작과 수백억 원이 소요된 한국 블록버스터들이 화려하게 입장할 때마다 셋방살이 신세가 돼야 했던 낮은 체급의 영화들은 신문고 한번 마음껏 두드려보지 못 한 채 조용히 찌그러져야 했던 게 서글픈 현실이다. 영화만 잘 만들면 손님이 몰리는 게 사실이어야 하지만, 그 이면엔 피도 눈물도 없는 배급 전쟁과 산업 논리가 숨어 있다. 적은 예산이지만 배우와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진 똘똘한 자국 영화들이 상영관을 못 잡고 IP TV로 떠밀려 가는 조기 강판 사례는 일일이 열거하기 입 아플 만큼 비일비재했다.
시사회 이후 호평 받고 있는 ‘좋은 친구들’은 ‘트랜스포머’와 ‘혹성탈출’을 피하기 위해 중간 지점인 7월 10일로 개봉일을 잡았지만, 본의 아니게 '우는 친구들'이 될 지 모른다. 다만 한 주라도 박스오피스 1위를 해 롱런 전략을 세웠을 텐데, 한 주 뒤에 나타나기로 돼있던 침팬지들이 서둘러 링에 올라온 것이다.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두 번이나 수상한 한양대 출신 신인 감독과 주지훈 지성 이광수는 한동안 침팬지 악몽을 꾸게 될지 모르겠다.
‘신의 한 수’와 ‘소녀괴담’도 ‘혹성탈출’ ‘드래곤 길들이기2’와 앞뒤 안전거리를 두기 위해 3일 개봉했지만, 침팬지들의 단순 변심으로 최소 100만~200만 관객을 헌납할 처지에 놓였다. 각각 45억, 9억의 제작비가 소요된 두 영화 입장에서 이 정도 스코어 타격은 다음 영화를 기획할 수 있느냐, 아니면 잠정 폐업을 고려해야 하느냐를 고민하게 만드는 생존의 수치다.
특히 ‘트랜스포머’를 제치고 개봉일 1위에 오른 ‘신의 한 수’는 정우성의 발군의 연기와 ‘뚝방전설’ ‘퀵’으로 한국 액션 장르의 차세대 주자로 부각된 조범구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점에서 아쉽다. 같은 날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하며 한국 공포 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는 ‘소녀괴담’ 역시 가성비 높은 영화로 330개가 넘는 상영관을 확보했지만 졸지에 풍전등화 신세가 됐다. ‘혹성탈출’이 개봉을 앞당기면서 벌써부터 상영관 캔슬이 우려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대했던 ‘트랜스포머’가 허약한 뒷심을 보인데다 긴 러닝타임 때문에 6월 장사를 망친 극장들은 12세 관람가 ‘혹성탈출’로 매출과 영업 이익을 기대하며 반전을 꾀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신의 한 수’ ‘소녀괴담’ ‘좋은 친구들’은 미디엄, 스몰, 엑스 스몰 사이즈 상영관으로 서서히 밀려날 것이고 조만간 IP TV로 풀릴 공산이 커졌다. 돈이 된다면 어떤 명분이라도 끌어다 붙이는 이십세기폭스코리아가 상생이 중요한 키워드가 된 21세기와는 참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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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