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촌극’ 속에 귀중한 시간이 날아갔다. 원점부터 재논의해야 하는데 해결해야 할 과제가 너무 많다. 결국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이하 축협)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하다. 사태를 빠르게 수습하느냐, 아니면 더 나락으로 빠져드느냐는 정 회장의 결단에 달려있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축구국가대표팀을 지휘했던 홍명보 감독은 10일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월드컵 이후 공식 석상에 나서지 않았던 홍 감독은 이날 “월드컵 출발 전에 국민들께 희망을 전해드리겠다고 다짐했지만 결과적으로 실망감만 안겼다. 정말 죄송하다”라면서 “부족한 저에게 많은 격려를 해주셨지만 오늘로 감독직을 사퇴하겠다. 앞으로 발전된 사람으로 많은 노력을 하겠다”라고 밝혔다.
월드컵에서의 부진한 성적으로 사퇴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홍 감독은 월드컵 직후 자진 사퇴 의사를 밝혔으나 정몽규 회장의 끈질긴 설득에 마음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론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고 ‘땅투기’ 의혹 등 불필요한 이슈까지 제기되자 사퇴 카드를 다시 꺼내들었다. 이 자리에서 허정무 축협 부회장 또한 사퇴 의사를 밝혔고 정 회장 역시 “축구협회는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쇄신하겠다”며 고개를 숙였다.

물론 사퇴만이 능사는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리고 뒤늦게나마 책임을 지는 사람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축협은 지금까지 ‘잘못은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기형적인 구조를 이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두 인사가 물러났다. 비정상이 조금씩 정상화되는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느릿느릿한 결단이 부른 흠까지 감추기는 어렵다. 월드컵 후 모든 것을 빠르게 결정했다면 보름여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잘못에 대한 반성이 가장 예민한 시기에서 발전의 방향을 놓고 허심탄회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축협이 홍 감독을 껴안고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이 귀중한 시간을 놓쳤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게 됐다. 당장 같은 시기에 탈락한 일본이 새 인사로 협회를 개혁하고 새 감독 물색에 근접했다는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난다.
늦은 만큼 빨리 달려가야 한다. 정 회장의 어깨가 무거운 이유다. 정 회장은 좁은 의미에서의 축구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한국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축구인이다. 프로축구연맹 회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축협의 회장으로 한국 축구의 또 다른 얼굴이 됐다. 정 회장의 리더십에 따라 좁게는 축협의 구조가, 넓게는 한국축구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수장의 리더십은 위기에 몰린 조직일수록 그 중요성이 커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정 회장은 프로축구연맹 회장 당시 개혁적인 성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몇몇 부분에서 현실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진통이 있기는 했지만 의도 자체는 신선하다는 이야기가 적지 않았다. 이런 정 회장의 성향이 축협 내부에서 새로운 바람으로 불어야 한다. 감독 선임도 중요하지만 시작은 축협 내부의 인사다. 정 회장은 취임 당시 “나는 야권, 여권 구분이 없다. 과거에 진 빚이 없기 때문이다. 축구 발전을 위해서라면 어떤 분이라도 함께 할 것이다”라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하면 된다.
10일에는 또 하나의 약속을 했다. 정 회장은 “축구협회는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쇄신하겠다”라고 강조했다. “그동안 쏟아진 많은 질타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개선책을 빠르게 마련하겠다”라고도 덧붙였다. 스스로 축협의 목표와 방향을 명확하게 세운 셈이다. 그 길로 달려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얼마나 추진력을 가지고 끌어가느냐는 리더의 역량이다. 정 회장의 차후 행보에 관심이 몰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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