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윤가이의 실은 말야] 장혁에게 뼈저린 배신감이 든다. 이렇게 웃길 거면 진작 보여주던가, 왜 그리도 오랜 세월을 숨기고 아껴왔단 말인가.
장혁이 MBC 수목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이하 운널사)를 통해 본 적 없는 파격 연기로 주목받고 있다. 망가짐을 불사한 표정에 과장된 액션이 어우러져 이보다 코믹할 수 없다가도 일순간 묘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감정 연기를 능수능란 오간다. 다소 오버스러운 코믹 연기가 일품이고 마치 제옷을 입은 듯 쏟아지는 칭찬을 듣고 있다.
'운널사'가 수목극 전쟁터에서 복병이란 평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실상 관계자들 사이에선 방송 시작 전만 해도 동시간대 라이벌인 KBS 2TV '조선 총잡이'나 SBS '너희들을 포위됐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대가 적었던 게 사실이다. 장혁이나 장나라나 모두 좋은 배우들이긴 하지만 과거 '명랑소녀 성공기'를 통해 이미 호흡을 맞춘 커플인데다 캐스팅 면에서 경쟁작들을 압도할 만한 포스는 딱히 없었다. 또 '조선총잡이'나 '너희들은 포위됐다'에 비해 스케일 면에서도 월등할 것이 없었다. 오히려 흔하디흔한 로맨틱 코미디물의 반복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그런데 뚜껑을 연 '운널사'는 장혁과 장나라 커플의 '찰진' 호흡만으로도 썩 볼만한 드라마가 됐다. 거기에 코믹하면서도 인간미 넘치는 대본, 또 이동윤 PD의 재치만점 연출력이 조화를 이루면서 기대 이상이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지난 16일 방송분이 동시간대 꼴찌에 머물긴 했지만 입소문이 늘어나면서 회를 더하는 뒷심을 기대해 봄직 하다. KBS나 SBS 관계자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운널사'의 시청률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정도다.
'운널사'가 이렇게 기분 좋은 무드를 조성하기까지는 뭐니 뭐니 해도 장혁의 공이 컸다는 분석. 장나라의 의기소침 평범녀 '김미영' 연기도 맛깔나지만 무엇보다 '폼 잡기 좋아하던' 장혁이 이렇게나 제대로 망가질 수 있는 배우였다는 데서 작품을 보는 쾌감이 크다. 사실 장혁은 앞서 '일밤-진짜 사나이'로 예능에 고정 출연하거나 일부 영화에서 다소 코믹한 이미지를 보여주려 하는 등 친근하기 위한 시도를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성과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기다리면 때가 오는 걸까. '운널사'를 만난 장혁은 어느 때보다도 친근하고 코믹하며 또 감동적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드라마 '추노'나 '고맙습니다' 속 무거운 캐릭터보다 '운널사' 속 이건 역할이 더 '훅' 당기는 건 비단 일부의 생각일까.
재벌가 9대 독자이자 대기업의 후계자인 이건은 갖출 것 다 갖춘 완벽남이다. 잘빠진 몸매에 명품 수트를 걸치고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굴리는 재벌이고 아리따운 발레리나 애인도 가졌다. 그러나 계약직 사원 김미영과 하룻밤의 사고로 얽히게 되면서부터는 이처럼 찌질하고 위태로울 수가 없다. 짐짓 멋진 표정을 하고 폼 나는 멘트를 날리고 무게도 잡아보지만 곱슬머리에 다크서클 분장으로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교차되면서 반전의 웃음을 선사한다. 장혁은 물이 오른 연기력으로 코믹과 진지를 오가는 이건의 버라이어티한 면모를 잘 살려내고 있다.
'추노'의 액션 연기에 대한 잔상도 남았고 '마이더스' 속 처절남도 떠오르긴 하지만 '운널사'는 감히 장혁의 대표작이 될 것으로 확신한다. 장혁에 느낀 이 배신감이 즐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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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널사‘ 방송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