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야구계는 구속에 완전히 목숨을 걸고 있다. 어디서나 레이더 건으로 구속을 측정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구 역사상 이 레이더 건보다 더 투수 평가를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장비도 없을 것이다. 투수들은 이 기괴한 물건이 자기 구속을 얼마로 측정하는지 무척 알고 싶어 한다. 구속이 시속 160km를 넘으면 사람들은 열광한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이라도 미끄러지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수근 거린다.’ -R.A. 디키 자서전 '어디서 공을 던지더라도'-
2012년 내셔널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한 너클볼러 R.A. 디키(40, 토론토)의 자서전을 읽으면, 파이어볼러였던 디키가 너클볼러로 변신하면서 받았던 고뇌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프로입단 후 약 10년 동안 마이너리그에 머물렀던 디키는 2010시즌, 프로 입단 14년차에 처음으로 빅리그 두 자릿수 승을 올렸다. 2006년부터 너클볼러가 되기로 결심, 처절하게 자신과의 싸움에 임한 끝에 성공을 이룬 것이다. 그러면서 디키는 투구의 해답이 절대 ‘빠름’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다.
LG 우완 선발투수 류제국(31)은 최근 디키의 자서전을 정독 중이다. 2001년 시카고컵스와 계약, 특급 유망주 대우를 받으며 미국에 진출했던 류제국은 디키를 통해 자신이 가장 좋았던 시기로 돌아가려고 한다. 류제국은 19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훈련을 마치고 “요즘 디키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며 “책을 보면 디키의 마이너리그 시절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나도 예전에 다 경험했던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모르는, 마이너리거의 생활, 마이너리그 구장들이 나오는데 그래서 내게는 더 공감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특급 유망주들이 그런 것처럼, 류제국 역시 구속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이미 덕수고 시절부터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가볍게 뿌렸던 류제국이다. 하지만 류제국이 투구의 정답이 ‘빠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류제국은 만22세였던 2005년, 마이너리그 투수코치의 지도를 통해 ‘효율적인 투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돌아보면 2005시즌은 내게 있어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이 때 투수 류제국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컵스 산하 마이너리그 더블A(웨스트 테네시 다이아몬드 잭스)에 있었다. 구속도 97, 98마일(156~158km)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구위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었다. 선발 등판 때마다 투구수가 많아 나가면 5이닝 밖에 못 던졌다. 투수코치께서 ‘투구수 100개 5이닝 10탈삼진 3실점과 투구수 100개 8이닝 탈삼진 0개 3실점 중에 뭐가 더 좋나?’고 물어보시더라. 당연히 후자라고 답했다.”
류제국은 2005시즌 웨스트 테네시 소속으로 27경기에 선발 등판, 169⅔이닝을 소화하며 11승 8패 평균자책점 3.34를 기록했다. 지난해 LA 다저스에서 뛰며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리키 놀라스코(32, 미네소타)와 완투펀치를 이뤘다. 류제국 개인 통산 최다 이닝을 소화한 해이며, 류제국 스스로 가장 좋은 컨디션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공을 던졌던 시기라고 한다.
“투수는 아웃카운트를 잡기 위해 마운드에 오른다. 150km 공을 던지든 120km 공을 던지든 아웃카운트만 잡는다면 상관이 없다. 당시 투수코치님이 리반 에르난데스의 예를 드셨다. 에르난데스는 플로리다 시절 97, 98마일의 공을 던졌지만, 지금은 88마일만 던진다고 했다. 어차피 아웃카운트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마찬가지기 때문에 굳이 힘들여서 던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 때부터 나도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맞춰 잡는 게 무엇인지, 범타를 유도해 아웃카운트를 늘리는 게 무엇인지 하나씩 알아갔고, 큰 효과를 봤다. 이후 수술을 했는데, 돌아보면 이 때만큼 잘 던졌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난해 류제국은 11년 만에 한국무대로 복귀해 LG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승리의 아이콘이 되면서 LG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끌었다. 파이어볼러는 아니지만, 패스트볼의 움직임과 절묘한 체인지업·커브를 앞세워 상대를 제압했다. 한국프로야구 첫 해이자, 재활 첫 해부터 12승 2패 평균자책점 3.87을 마크, 앞으로 LG는 물론 한국을 대표하는 에이스투수가 될 것이란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류제국에게 2014시즌은 만만치 않은 한 해가 되고 있다. 스프링캠프를 마치고도 투구밸런스를 잡지 못했고, 100%에 한참 못 미치는 컨디션으로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극심한 기복에 시달렸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운도 따라주지 않아 8경기 동안 선발승이 없었다. 5월 23일 첫 승을 올렸지만, 투구내용은 저조했다. 이후 류제국은 자신이 가장 좋았던 2005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기로 결심했다. 다이어트를 통해 체중도 2005년으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2005년에도 지금과 비슷했다. 시즌 중 다이어트를 했고, 점점 더 투구밸런스가 좋아졌다. 투수가 살을 빼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많은 것은 알지만, 이미 경험했고 내가 결심한 일이기에 후회 없이 실행할 것이다. 힘든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이제 2, 3kg만 더 빼면 가장 좋은 투구밸런스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물론 당시의 구속까지 되찾겠다는 것은 아니다. 투수라면 어쩔 수 없다. 몸 상태에 맞춰서 던져야한다. 디키의 책을 보면서 다시 느끼고 있다. 150km 이상을 던졌을 때와 지금의 내 몸은 확연히 다르다. 수술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2005시즌에 했던 효율적이고 꾸준했던 모습은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덧붙여 류제국은 이전보다 정교한 제구력과 구위로 주목받고 있는 자신의 커브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올 시즌 류제국은 커브의 비중을 늘렸고, 이미 패스트볼·체인지업에 이은 세 번째 구종으로 장착한 상태다. 각도 큰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만들기도 하고, 홈플레이트 앞에서 떨어뜨려 헛스윙 삼진을 유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류제국은 지금의 커브가 베스트는 아니라고 했다. 미국무대서는 더 좋은 커브를 던졌고, 앞으로 당시의 커브를 구사하게 될 것이라 다짐했다.
“작년보다는 커브 제구가 잘 되고 있기는 하다. 상대 타자들의 머릿속에 커브를 심으면서 효과도 보고 있다. 그러나 아직 최고의 커브는 아니다. 커브는 내가 처음으로 장착한 변화구였다. 원래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빠른 공만 던졌었다. 슬라이더가 잘 안 돼서 커브를 던졌고, 미국에서 수술을 받기 전까지는 지금보다 각도가 훨씬 컸다. 불펜에서 던지고 있으면 선수들이 몰려와서 구경할 정도였다. 지금은 수술경력도 있으니까 그 때만큼 과감하게 체고 있지는 못하다. 차차 더 강하게 첼 것이다. 그러면 구속도, 각도도 지금보다 더 좋아질 것 같다.”
류제국의 후반기 목표는 단 한 가지, ‘팀 승리’다. 류제국은 지난 16일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잠실 삼성전서 선발승에 성공, 시즌 5승을 거뒀다. 후반기 9경기 정도 선발 등판 기회가 있기 때문에 충분히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을 바라볼 수 있다. 하지만 류제국은 선발승에 대한 욕심은 이미 내려놓았다.
“올 시즌 참 힘들게 첫 승을 올렸다. 솔직히 잘 던졌는데도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을 때는 정말 힘들었다. 괜히 야수들이 실책했던 것을 생각했고, 타자들이 점수를 못 뽑은 장면들이 머릿속에 맴돌기도 했다. 지금은 괜찮다. ‘내 역할만 잘하자, 나만 잘하면 팀도 잘 될 것이다’고 생각하니 더 집중됐고, 다른 쪽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5승은 하지 않았나. 다행히 우리 팀 선발투수들과 비슷하게 가고 있다. 이거면 됐다. 두 자릿수 승 달성을 의식하지는 않겠다. 내가 잘 던져도 팀이 지면 의미 없다. 팀이 이겨야 한다. 내 선발승보다 팀 승리에 집중하며 던질 것이다.”
마지막으로 류제국은 ‘꾸준한 투수’가 되고 싶다고 했다. 미국시절을 포함, 프로 13년차인 만큼 극적인 기량 향상보다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해 팀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은퇴할 때 ‘최고’는 아니었지만, 쉽게 흔들리지 않았고 팀이 승리할 기회를 줬던 투수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나중에 사람들이 류제국하면 꾸준했던 투수라고 회상해주기를 바란다. 무실점 투구를 보장하는 투수는 아니더라도, 꾸준히 6이닝, 많은 실점은 허용하지 않는 그런 투수가 됐으면 좋겠다. 솔직히 지난 시즌 후에는 앞으로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선발승도 작년처럼 쉽게 올릴 것 같았다. 그런데 냉정히 말해 지금의 나는 더 올라가기는 힘든 나이다. 그래도 꾸준한 모습은 보여드리고 싶다. 등판할 때마다 팀이 승리할 수 있게 만드는 투수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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