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최민식 주연 사극 영화 ‘명량’이 ‘군도’와 ‘해적’ 틈에서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를 놓고 다양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 주 앞서 개봉한 ‘군도’가 나흘 만에 가뿐하게 200만 관객을 끌어 모으며 일찌감치 텐트 폴대를 세운 가운데, 약체로 분류된 ‘해적’까지 기대를 웃도는 잘 빠진 코미디로 확인되면서 팽팽한 여름 극장가 3파전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세 작품 모두 치열한 지역 예선을 거쳐 여름 결승 무대에 진출한 대표 선수들인 만큼, 누구 하나 크레바스에 빠지지 않고 골고루 관객을 분산 유치하지 않겠냐는 예상이 우세하다. 하지만 쇼박스 ‘군도’가 상반기 최고 기대작다운 스타트를 보인 것에 비해 네티즌들로부터 6점대의 저조한 평점을 받고 있어 롱런 전략에 차질이 빚어졌다.
현재로선 ‘군도’가 ‘변호인’ ‘수상한 그녀’처럼 꼭 봐야 할 영화로 자리매김하긴 어려워 보이지만, 엇갈리는 호불호가 반드시 흥행 적신호로 직결되는 건 아닌 만큼 스노우볼 여부는 좀 더 관찰이 필요할 것 같다. 아무래도 성난 민심의 위대한 힘을 맛보고 싶었던 많은 남성 관객들이 흩날리는 꽃잎과 함께 등장한 강동원의 예쁜 얼굴에 실망감과 당혹감을 담은 1점 콩알탄을 던지는 게 아닌가 싶다.

평이 엇갈리기는 CJ의 대작 ‘명량’도 마찬가지다. 하이라이트인 후반부 61분 해전신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만큼 압도적이지만, 거꾸로 중반까진 다소 지루한 감이 있고 아무리 원톱이라 해도 최민식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과했던 것 아니냐는 일부 불만의 목소리도 나온다. 안타고니스트인 왜적 3인방 류승룡 조진웅 김명곤을 극적 지렛대로 더 활용했어야 하고, 민관군의 협력도 더 밀도 있고 눈물 나게 그렸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아쉬움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명량’은 도입부터 엔딩까지 철저하게 이순신에게만 초점을 맞춘 최민식의 영화가 돼야 성공한다는 생각이다. 단순히 분량의 문제가 아니다. 전기 영화인만큼 이순신의 고뇌와 우국충정이라는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플롯이 이 영화를 끌고 가는 유일한 엔진이어야지, 괜한 의욕을 앞세워 주변 인물들의 스토리를 살리고 어설프게 드라마를 펼쳤다간 오히려 극적 긴장감과 카타르시스가 저하될 우려가 있다. 누명을 쓰고 관직을 박탈당한 뒤 백의종군해야 했던 장군의 절망과 수군통제사로 복귀해 패배가 불을 보듯 뻔한 전쟁터에서 발휘되는 강력한 영웅의 리더십이 '명량'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사람은 이익을 추구하려는 성향 보다 손실을 회피하려는 심리가 훨씬 강하다고 한다. 불확실한 성공과 확실한 실패 사이에서 불면하는 불멸의 이순신은 남들보다 뛰어난 성과와 업적을 보인 아웃라이어임에 틀림없지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최악 그 자체였다. 자신을 100% 신임하지 않는 선조와 두려움과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부하들. 여기에 불타 소실된 거북선과 남아있는 12척의 판옥선까지. 이순신은 이런 악조건을 진도 울돌목 소용돌이 지형에 적을 끌어들이는 기막힌 전술로 한 번도 패한 적 없는 23전 23승이라는 위대한 해전 신화를 쓰게 된다.
김한민 감독은 전작 ‘최종병기 활’을 찍으며 호랑이 출연을 놓고 거센 이견에 부딪친 적이 있다. 무리한 설정이며 무엇보다 CG 비용이 많이 든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끝까지 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호랑이가 민족 수호신인 동시에 민초들을 지켜주는 영물로서 영화의 중요한 메타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삼성영상사업단 말단 직원 시절부터 역사의식과 민족관이 남달랐던 김한민 감독이 자신의 염원이던 충무공 영화 연출과 제작에 목숨을 걸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젊은 세대들에게 영화로나마 민족혼을 불어넣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용장 밑에 약졸 없음을 몸소 보여준 충무공의 거룩한 해전사를 통해 후예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싶었던 것이다.
주위 분식집에 가보면 족히 50개가 넘는 메뉴 때문에 주문의 어려움을 겪을 때가 종종 있다. 이런 메뉴판은 얼핏 ‘저희는 손님의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고 있습니다’로 비춰질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저희 집은 잘 하는 메뉴가 하나도 없습니다’라는 말이기도 하다. 고객 입장에선 이런 분식집 보단 냉면이나 설렁탕, 칼국수집처럼 단일 메뉴를 파는 전문점이 훨씬 믿음이 간다. 이런 곳은 그 카테고리에 관한한 고객의 입맛을 충족시켜줄 비장의 조리법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특정 재료를 자주 사용하므로 신선도도 뛰어날 가능성이 높다. 이것저것 손대는 집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집 보다 효용이 떨어지게 돼있다.
감독들도 촬영 중 흥행에 대한 욕심이나 압박감 때문에 패착을 둘 때가 간혹 있다. 뜬금없이 배우들의 노출신을 추가한다거나 무리한 웃음과 최루 코드를 끼워 넣는 식이다. 김한민 감독이라고 그런 인간적 유혹이 아주 없진 않았을 것이다. 류승룡 진구 등 힘들게 섭외한 많은 배우들에게 적정 분량을 보장하지 못하는 미안함도 있었을 테고, 150억이라는 제작비의 중압감도 상당했을 거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약속된 시나리오와 콘티를 건드리지 않고 잔재주를 삼가며 뚝심으로 본질과 초심을 지켜냈다. 그 결과 ‘명량’은 처음 의도한대로 묵직하게 빚어졌고, 이제 관객의 선택을 앞두고 있다. 이런저런 메뉴를 늘려가는 분식집의 오류에 빠지지 않고, ‘활’에 이어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또 한 편의 레이블 영화를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과연 ‘냉면집 사장’ 김한민이 까다로운 고객들 입맛을 얼마나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이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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