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을 던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투수다. 하지만 좋은 포수는 그런 투수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낸다. 보이지 않지만 큰 가치가 있는 이유다. 그런 측면에서 정상호(32, SK)의 가치는 여전히 살아있다. SK의 후반기 대반격에는 정상호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상호는 입단 때부터 대형 포수감으로 큰 기대를 모았다. 박경완(현 SK 퓨처스팀 감독)이라는 기라성 같은 포수 뒤에서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다. 박경완이 부상으로 고전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팀의 주전포수로 안방을 지켰다. 수비력과 장타력에서 모두 인정을 받는 포수다. 하지만 항상 잔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 올 시즌에는 리그 수위타자 이재원의 급성장에 포수 마스크를 나눠 쓰고 있다. 66경기 출전, 선발로는 40경기 출전이다.
이재원은 공격하는 포수다. 올 시즌 타율이 무려 3할8푼6리에 이르는 리그 타율 선두다. 공격적인 라인업을 짜기 위해서는 이재원이 포수 마스크를 쓰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그간 포수로 인정을 받기 위해 남몰래 땀을 흘려온 이재원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하지만 포수는 어쨌든 수비가 더 중요한 포지션이다. 투수와 함께 타자를 상대하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그래서 정상호의 가치는 유효하다. 26일 문학 넥센전은 상징적이다.

이날 SK 선발로 나선 김광현은 0-0이었던 4회 무사 만루의 위기에 몰렸다. 타선의 흐름도 초반 꼬이는 양상이었다. 점수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감에 흔들릴 수 있었다. 자칫 대량 실점할 경우 분위기를 완전히 넘겨줄 수 있는 위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정상호는 김광현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상호는 “그냥 아웃카운트를 잡는다는 생각으로 경기를 하자. 나가 있는 3명의 주자는 모두 점수를 준다고 생각하자”라며 김광현의 마음을 다독였다.
최선을 다해 공을 던진 김광현처럼 정상호도 최선을 다해 볼 배합을 했다. 무사 만루에서 리그 최고의 장타자 박병호를 상대한 김광현은 첫 네 개의 공을 연거푸 직구로 던져 유리한 카운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5구째가 회심의 한 수였다. 정상호가 요구한 공은 커브였다. 김광현이 승부처에서 썼던 구종은 아니었다. 계속 직구를 봤던 박병호의 타이밍을 뺏기 위한 한 수 였다.
김광현은 “커브 사인이 났는데 사인을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공을 던지기 전 발을 풀어야 하나 고민을 했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상호의 요구는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을 거뒀다. 김광현의 주무기를 노렸던 박병호는 예상치 못한 느린 커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김광현도 “스스로도 믿기지가 않았다”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정상호의 노련함이 빛을 발한 것이다.
다음 타자인 강정호를 루킹 삼진으로 잡은 것도 정상호의 보이지 않는 공헌이었다. 정상호는 박병호 타석 때와는 반대로 슬라이더 세 개를 연거푸 요구했다. 정상호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가운데서 몸쪽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에 넥센 타자들이 잘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깥쪽에서 가운데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요구했다”라고 했다. 상대의 반응, 그리고 김광현의 공 상태에 대해 잘 아는 정상호의 이런 전략은 유리한 카운트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강정호는 4구째 직구에 당했다. 리그 최고의 타자들이 정상호의 볼 배합에 당한 것이다.
그런 정상호는 후반기 들어 주전 포수로 중용될 가능성이 커졌다. 후반기 3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나섰다. 정상호는 이에 대해 “아직 후반기가 시작된 지 얼마되지 않았다”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팀 내 비중은 결코 가볍지 않다. SK는 외국인 타자 하나 없이 남은 일정을 치러야 한다. 이재원이 지명타자로 고정될 가능성이 높다. 조인성이 트레이드로 떠난 마당에 결국 정상호가 든든한 리더십으로 투수들을 이끄는 경기가 많아질 것임을 시사한다. 숨어있는 자신의 가치를 십분 발휘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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