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무'(심성보 감독)는 광기에 사로 잡힌 인간들 속에 펼쳐지는 처절한 멜로드라마다. 한 순간 예고도 없이 닥쳐오는 비극. 불안이 감지됐기에 더 안타까운 상황은 인간을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해무'는 이 '몰아넣는' 과정 속에 변화하는 인간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래 인간 속에 내재된 욕망이나 집착이 극단을 만나 폭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사랑도 포함된다.
영화는 IMF 시대를 배경으로 한 때 여수 바다를 주름잡던 전진호가 감척 사업 대상이 된 후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배를 잃을 위기에 몰린 선장 철주(김윤석)는 배와 선원들을 살리기 위해 밀항을 결심하게 되고 낡은 어선 전진호는 그렇게 비밀을 안고 위험한 출항을 알린다.
배에는 선장을 필두로, 인정 많고 사연 많은 기관장 완호(문성근), 선장의 명령에 복종하는 갑판장 호영(김상호), 돈과 여자가 세상에서 최고인 경구(유승목), 열등감과 욕정에 사로잡힌 창욱(이희준), 그리고 갓 뱃일을 시작한 순박한 막내 동식(박유천)까지 여섯 명의 선원이 몸담는다.

가족같지는 않더라도 나름 끈끈한 사이를 자랑하던 이들이 균열하게 되는 것은 밀항 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부터다. 계획은 실패하고 상황은 꼬인다. 거기에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해무까지 밀려오자 사람들은 점점 미쳐간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사랑은 피어나고 이 사랑은 영화의 중요한 '사건'이 된다. 선원이 실어 나르게 된 것이 고기가 아닌 사람이되면서부터 예고된 만남. 동식은 오빠를 찾기 위해 밀항을 결심한 조선족 홍매(한예리)에게 첫 눈에 반하고, 운명같은 사랑을 느낀 그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의 순간이 있다. 그것이 묘한 쾌락과 연결돼 있다고 하더라도, 진동하는 썩은 냄새는 스크린 밖으로 스멀스멀 풍겨나오는 것 같고, 한 치 앞도 못 보게 안구를 휘감는 해무의 축축함은 피부와 맞닿는 것만 같아 일면 소름이 끼친다. 그렇게 공간이 살아 숨쉰다. 한정된 공간과 정신줄을 놓는 인간들. 여기에서 스릴이 발생하는데 욕정에 눈 먼 창욱이 홍매를 발견하는 순간에서는 봉준호식 공포감이 느껴진다.
습한 바닷 공기 속에 인간 밑바닥의 '날 것'들이 질척거린다. 일면 사이코 패스처럼도 보이는 선장은 책임감인지 이기심인지 모를 광기에 사로잡히고, 어딘가 부족해보이는 선원은 맹목적인 욕정으로 이런 선장으로부터 도리어 "미쳤다"란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사람은 누구일까. 유일하게 위험에 빠진 여자를 보호하고 지켜내려는 동식이는 정상일까. 첫 눈에 사랑의 감정을 느낀 여자만을 위해, 그 여자를 곁에 두기 위해 자신을 내던지는 동식 역시 어떻게보면 위기 속에서 피어나 더 절박한, 사랑에 미친 한 인간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영화는 인간이 온전히 인간적일 수 없는 상황, 극단적으로 생존의 기로에 몰렸을 때는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 때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란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누군가를 배를 지키고, 누군가는 본능 욕구를 채우려 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하고 소중한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는 한낱 미친 열정에 지나지 않을 때 생기는 상처. 홍매를 두고 "쟤가 대체 뭐라고?"라고 소리치는 선장 김윤석의 목소리에는 절실함이 묻어있다.
김윤석 캐릭터의 기시감, 조선족 캐릭터의 등장, 황폐한 분위기 등 때문에 '황해'를 떠올리거나 연극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고도의 심리드라마로 바라보는 사람도 있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이 작품이 얼마나 절절한 멜로드라마인지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듯 하다.
주인공 박유천(JYJ)은 봉테일(봉준호) 사단의 꼼꼼한 설계 속에 차분한 연기를 펼쳤고, 한예리의 조선족 사투리 연기는 감탄스러우며, 이희준은 유일하게 스릴과 웃음을 동시에 주는 인물이다. 나머지 배우들의 앙상블 역시 뛰어나다. 동명의 연극을 영화화했다. 8월 13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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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