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적’ 손예진, 어떻게 해야 이 언니를 다시 미워할 수 있을까?
OSEN 손남원 기자
발행 2014.08.02 07: 31

[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배우 손예진을 육안으로 처음 본 건 영화 담당 초년병 기자 시절인 2002년입니다. 태흥영화사가 마련한 ‘취화선’ 양수리 세트 현장 공개에서였죠. 하이텔과 나우누리 시절이던 당시만 해도 촬영장에 기자들을 불러 놓고 빈 필름 통을 돌리며 촬영하는 척 영화를 홍보하곤 했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최민식 인터뷰를 모두 마치고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데 대뜸 태흥 이태원 사장이 “우리 작품에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며 소개한 신인이 바로 한복 곱게 입은 손예진이었습니다. 옆에 있던 최민식도 “예진아, 근데 너 올해 몇인데 이렇게 연기 잘 하는 거냐?”라며 껄껄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돌이켜보면 선수가 선수를 알아본 것이죠.
 대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오가며 연기 수업 받은 지 2년 만에 얻은 큰 배역이었고, 손예진은 하늘에서 내려온 이 동아줄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각종 신문, 잡지에 올해를 빛낼 유망주로 소개되더니 이듬해 곧장 윤석호 PD의 KBS 드라마 ‘여름향기’와 영화 ‘연애소설’ ‘클래식’의 주인공으로 연달아 픽업되더군요. 본인은 ‘저도 흑역사가 존재한다’고 할지 모르지만, 3자의 눈으로 봤을 땐 놀라운 고속 승진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도 높은 타율을 보였지만, 손예진의 진가가 드러난 건 스크린 쪽이었습니다. 2004년 정우성과 공연한 ‘내 머릿속의 지우개’로 멜로 퀸 반열에 오르더니 ‘외출’ ‘작업의 정석’ ‘무방비도시’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정점을 찍은 건 2008년 문제적 인물 주인아로 출연한 ‘아내가 결혼했다’였죠. 그녀는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이후 ‘백야행’ ‘오싹한 연애’ ‘타워’ ‘공범’으로 스펙트럼을 넓혀갑니다.
드라마 ‘연애시대’ ‘스포트라이트’에 주력하던 2006~2007년 두 해를 제외하고 손예진은 1년에 한 편씩 신작 영화를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놀라운 자신감과 회전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흥미로운 건 출연작마다 겹치는 캐릭터나 비슷비슷한 배역을 단 한 번도 맡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배우 영화가 좀처럼 기획되지 않는 척박한 토양임을 감안해보면, 그녀가 티케팅파워 1순위 배우란 걸 조용히 입증하는 사례입니다.
 부끄럽지만 한때 손예진을 이유 없이 깎아내렸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인터뷰 하면서 쓰지 않기로 한 약속을 몇 번 어겼고, 간혹 사실관계를 부풀려 흥미 위주의 제목을 달았는데 그게 상대를 열 받게 한 겁니다. 손예진은 소속사를 통해 “대체 왜 그러시냐”며 여러 번 불만을 제기했고 한동안 인터뷰 기피 대상이 된 적도 있습니다. 능력 보다 욕심이 앞섰던 기자의 몰염치와 무능, 또 저도 모르게 몸에 배어있던 ‘갑질’ 때문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사과했고 오해가 풀렸지만 “직업에 충실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죠”라며 오히려 이해심을 발휘해준 건 늘 손예진이었습니다. 워낙 출중한 남자 배우들과 연기한 탓일까요. 신인 때부터 안티를 몰고 다녔던 손예진이 그들에게 공격당하고 헐뜯는 악플이 달릴 때마다 그걸 읽으며 묘한 동질의식을 느끼곤 했던 제가 참으로 측은하고 한심스러운 적도 있었습니다.
 지난주 ‘해적’ VIP 시사에 갔다가 오랜 만에 손 배우를 만났습니다. 여전히 씩씩해 보였지만 빡센 홍보 일정 때문에 다소 지친 기색이었습니다. “기자님, 영화 어떻게 봤어요? ‘군도’ ‘명량’ 센 영화들과 붙는데 우리 ‘해적’도 응원해주실 거죠?”라며 선뜻 악수를 청하더군요. 주위에 사람들이 많아 “그럼요. 소단주님”이라고 답했는데 “어, 저 소단주 아닌데. 나중에 대단주되는데”라고 받아치는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이날 ‘해적’ 미술감독으로부터 손예진의 촬영 뒷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한 겨울 후룸라이드 신으로 불린 수로 장면을 찍던 날, 스태프들은 죄다 핫팩에 노스페이스 점퍼를 입고도 어금니를 부딪칠 만큼 추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손예진 혼자 얇은 옷을 입은 채 수로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장면을 하루 종일 찍었던 겁니다. 여름 영화인데 최대한 시원하게 보여야 한다며 재촬영을 요구한 것도 손 배우였다고 합니다.
‘마이웨이’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미술팀장 출신인 김지아 감독은 “손예진씨와 처음 작업했는데 그 살벌한 엄동설한에 한 마디 불평 없이 감독의 디렉션을 모두 따르는 모습을 보고 같은 동갑 여자로서 존경심이 들었다. 여배우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뀐 계기”라고 말하더군요. CG를 담당한 덱스터필름 강충익 디렉터도 “고된 촬영을 마치고 새벽 한 시에 배우들의 전신 스캔을 떠야 했는데 남자 배우들은 모두 피곤하다며 다음날로 미루고 숙소로 돌아갔는데, 손예진씨만 혼자 와서 해 뜰 때까지 스캔 작업에 임해줬다”며 혀를 내둘렀습니다.
스태프들의 이름을 모두 외워 불러주는 디테일은 없지만, 손예진과 함께 일해 본 현장맨들은 그녀의 성실하고 프로다운 모습에 한 번 놀라고, 털털한 인간미에 두 번 놀란다고 합니다. 연기만 잘 하면 칭송받는 외국 배우들과 달리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외에 사생활과 인성까지 좋아야 대중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습니다. 도덕적 우월주의까지 요구받는 것이죠. 손예진이 지금처럼 계속 우리 심장을 뛰게 만드는 감동을 배급하는 배우가 되길 바랍니다.
bskim0129@gmail.com

Copyright ⓒ OSEN.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