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무'(심성보 감독, 13일 개봉)에서 가장 파닥파닥 생동감 있게 관객들에게 다가오는 인물 중 한 명은 경구다. 한껏 멋을 부렸지만 촌스러운 정서를 담고 있는 퍼머 머리에 날티나는 행동거지,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유머러스함. 돈이 세상에서 최고인 거친 성격의 롤러수 경구는 마지막까지 언제 어디로 튈 지 몰라 한 시도 눈을 떼기 힘들다.
이런 경구 역을 연기한 배우는 유승목이다. 1969년생. 그간 드라마 '칼과 꽃', '처용', '판다양과 고슴도치', 영화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 '짐승의 끝', '7급 공무원', '그림자 살인', '내 사랑 내 곁에', '퀵', '나는 공무원이다', '특수본', '늑대소년', '몽타주', '낚시', '사이코메트리', '플랜맨' 등 셀 수 없는 다양한 작품에 등장해 얼굴을 알린 연기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해무' 속 변신은 큰 한 방일 게 분명해 보였다. 그 만큼 큰 존재감이다.
"대본을 보고 경구 역할을 정말 하고 싶었어요. '이건 나를 위해 쓴 글 같다'라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20여년 연기를 하면서, 성격이 소극적이고 폐 끼치는 걸 싫어해 지인이 작품을 한다고 하면 일부러 연락을 잘 하다가도 안 했어요. 하지만 '해무'는 욕심이 났어요. 우연찮게 지인 분들이 '해무'라는 좋은 작품이 있는데, 네가 하면 어울릴 거 같다, 란 말씀을 해 주시니 저절로 욕심이 났죠. 제가 먼저 감독님께 연락을 드렸고, 그리고 나서 한참 뒤 캐스팅 결정이 났다고 연락이 왔는데 정말 감사했죠. 선원으로 한 배를 타게 돼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그에게 바로 전작은 영화 '한공주'였다. 영화 속에서 딸 공주(천우희)를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는 매정하다 못해 비정한 아빠. 그러나 그런 '한공주' 속 아빠의 모습이 '해무'의 경구와 잘 겹치지 않는다. 실제로 제작을 맡은 봉준호 감독은 유승목에 대해 "팔색조 같은 배우"라고 그의 유연한 변신력을 장점으로 짚은 바 있다.
연극을 1990년도부터 해서 24년째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 연극을 쭉 하다가 영화로 제대로 발을 들인 것은 '살인의 추억' 이후. 봉준호-심성보 콤비와의 두 번째 인연이다.
'해무'가 자신의 배우 인생에 있어 터닝포인트가 될 작품이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지금까지 꾸준히 만족해왔는데, '해무'는 유승목이란 배우의 터닝포인트라고 하기 보다는, 내 스스로 돌아봤을 때 너무나 좋고 훌륭한 배우들과 함께 해서 더 의미 있던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그에게 경구가 아닌 다른 역을 해야 한다면, 누구를 하고 싶냐고 물었다.
"저는 다시 해도 경구요. 창욱이도 매력적이긴 한데 (이)희준이가 너무 잘 해서 엄두가 안 나요. 다들 저렇게 잘 하는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못 해요. 사실은 호영(김상호)이라는 캐릭터가, 가장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다른 캐릭터들은 보여주는 부분이 있는데 호영은 두드러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이 상당하죠. 내공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김상호라는 배우가 했기에 정말 잘 표현을 해 준 것 같아요."
영화 속 극한 상황에 몰리면서 선원들은 자신의 본능과 욕망을 내보이는데 철주(김윤석)는 배에, 경구는 돈에, 창욱(이희준)은 여자에, 그리고 동식(박유천)은 사랑에 집착한다. 만약 경구가 아닌 유승목이라면, 배 안에서 무엇을 갈구하며 집착할 것 같냐고 물었다. 그러자 '가족'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유승목으로 배를 탔으면 호영처럼 가족이였을 거예요. 사실 경구가 돈을 더 챙기려고 하지만, 빨리 해결해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거예요. 촬영하면서 창욱이나 동식이한테 '우리 빨리 끝내고 집에 가자' 이런 얘기를 저절로 막 하고 싶더라고요. 유승목이라면, 날 기다리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버텼을거예요."
딸이 아직 미성년자라 청소년 관람불가인 이 영화를 보지 못한단다. 그는 "볼 나이가 되면 아빠에게 자부심을 갖게 됐으면 좋겠다"라며 미소지었다.
영화 속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묻자 그는 "동식과 홍매(한예리)의 사랑도 여운이 남지만, 후반부 갑판 위 홀로 남겨진 선장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 선원들이 1시간 50분 달려왔던 그 모든 느낌들이 선장님의 마지막 눈빛에 녹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장면이 최고 아닌가 싶다"라고 말하며 영화의 여운을 되새겼다.
"윤석 형님을 이번 영화를 통해 처음 실제로 뵜어요. 스크린으로 뵜을 때는 몰랐는데, 막상 실제로 보니까 되게 수더분하시고 선장처럼 선배로서 많이 이끌어주시더라고요. 늘 촬영을 마치고 술 한 잔 씩 했어요. 그러니까 잠자기 전까지 매일 촬영장의 연속이었고, 또 촬영장이 현실 같은 분위기로 이어져 연기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런 부분이 영화에 리얼하게 잘 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윤석 형님은 정말, 연기에 푹 빠져서 크게 헤엄치시는 모습에서 제가 얼마나 작은 사람인지 느끼게 해요. 아 나는 정말 좁았구나, 앞으로 잘 해야겠구나, 많이 배웠어요. 달리 김윤석이 아니더라고요."

막내 동식을 연기한 박유천에 대해서도 묻자 바로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린다. "정말 스타맞아? 이랬어요. 대단해요. '어떻게 저러지?' 계속 그랬어요. 윤석 형님도 유천이를 극찬했고요. 아무리 힘들어도 티를 안내요. 본인이 원래 인품이 된 것 같아요. 몸이 꽁꽁 얼었는데도 힘든 내색 한 번을 안하더라고요. 손 난로도 없이 맨발 꽁꽁 얼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있는데, 솔직히 저보다 훨씬 나아요."
실제로 이 영화의 큰 관전 포인트는 배우들의 앙상블이다. "신기하더라고요. 극악의 상황을 과연 배우들이 어떻게 표현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저도 그게 제일 고민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촬영 당일 리허설에 들어가니까 분위기가 확 잡히더라고요. 워낙 잘 하시는 분들이 있으니 자연스럽게 빠져서 그냥 간 것 같아요. 놀라운 경험이었죠. 다들 눈빛이 상황에 빠져있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막 대사가 나오고요."
유승목은 인터뷰 내내 "감사하다"란 말을 자주 했다. '해무'를 할 수 있어서, 좋은 배우-제작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좋은 역할로 캐스팅 돼서, 앞으로 연기를 잘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해 줘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베테랑 연기자의 덕목 중 하나는 겸손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다.
"'해무'는 기존에 보지 못했던, 아주 팽팽한 긴장감을 포장되지 않은 채 아주 리얼하게 1시간 50분 끌고 가는 영화입니다. 한 마디로 도미노 같은 영화죠. 그 긴장감과 리얼함이 분명 관객들을 즐겁게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경구는, 순박한 어촌의 총각이니까 사랑스럽게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런 인물이 있구나'라고요. 나쁘게 보지만 마시고 애착을 갖고 봐주세요. 하하."
nyc@osen.co.kr
정송이 기자 / ouxou@osen.co.kr, '해무' 스틸(세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