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김범석의 사이드미러] 손예진이란 배우를 10년 넘게 지켜봤지만, 3일 그녀에 대해 전혀 몰랐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돼 꽤나 신선했습니다. 그동안 연기 잘 하는 여배우 중 한 명이란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날 영화와 연기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과 진정성의 소유자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해줬기 때문입니다.
‘해적’ 700만 돌파 자축 공약 이벤트가 열린 서울 건대 롯데시네마 5관. 손예진이 이석훈 감독과 김남길 이경영 김원해 등과 무대에 오른 건 오후 7시 20분이었습니다. 가죽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모습을 드러낸 손예진은 “언니 예뻐요”란 관객들의 연호에 환하게 웃으며 양손 브이로 화답했고, 예상을 깨고 두 번이나 무대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한 번은 즉석 이벤트에 당첨된 한 여성 관객과 단체 셀카를 찍을 때였고, 또 한 번은 모든 배우들이 추석을 앞두고 관객들에게 감사의 큰 절을 올릴 때였습니다. 짧은 치마 탓에 무릎 꿇는 게 불편해 보였지만 전혀 주저하는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인사말에서 “10년 동안 일하며 공약을 내걸었던 건 이번 ‘해적’이 처음이었는데 여러분들의 성원 덕에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뭐 여기까진 주연 배우의 의례적인 멘트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범 답안에서 벗어난 추가 발언이 많은 이들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더군요. 사회자가 “700만으로 만족하기 어려울 텐데 배우 분들은 각자 몇 만까지 예상하느냐”고 질문했고 다양한 답변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마이크를 건네받은 손예진이 작심한 듯 “처음 생각했던 스코어가 700만이었는데 내친 김에 1000만까지 갔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여기 계신 롯데 관계자분들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3일부터 롯데 추석 영화 ‘타짜2’가 상영 중인데 손님이 찾을 때까진 ‘해적’을 포기하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읍소이자 귀여운 경고였던 겁니다.
배급 관행과 시스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손예진이 롯데의 변심에 따라 ‘해적’의 최종 관객 수가 달라질 수 있음을 드러내놓고 공론화한 것이죠. 롯데가 ‘타짜2’에 올인 하다 보면 ‘해적’ 상영관이 그만큼 쪼그라들 게 명약관화한 만큼, 너무 야박하게 상영관을 줄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이었던 겁니다. 손예진의 이 발언에 현장에 있던 롯데 임직원들의 표정이 흥미진진했습니다. 누군가는 손 배우의 당돌한 발언에 입을 막으며 웃었고, ‘타짜’ 팀은 본의 아니게 썩소를 지어야 했습니다.
롯데가 이미 투자금을 회수한 ‘해적’을 얼마나 배려할 지는 그 누구도 모릅니다. 기업의 이해관계에 따라, 구체적으로 롯데시네마 프로그래머들의 점유율 계산법에 따라 상영관 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걸 떠나 이날 손예진의 돌직구에 가까운 신상 발언은 그녀가 ‘해적’에 얼마나 애정과 주인의식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 반가웠습니다. 감독과 김남길조차 대놓고 말하지 못했던 간지러운 곳을 여주인공이 시원하게 긁어줬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웬만한 남자들보다 대담했던 대단주 여월의 모습이 겹쳐졌다면 비약인 걸까요.
사실 올 여름 손예진은 남모르게 외롭고 불안했을 겁니다. ‘군도’ ‘명량’ ‘해무’ 등 내로라하는 빅4 중 자본에 책임져야 하는 유일한 홍일점 배우였기 때문입니다. 데뷔작 ‘취화선’ ‘클래식’부터 최근작 ‘공범’까지 지금껏 단 한 번도 손익분기점을 밑돈 영화가 없었던 그녀이기에 이번 여름 대첩은 그녀에게 한결 더 부담과 중압감으로 다가갔을 겁니다.
우려했지만 결과적으로 페이스메이커로 판명된 ‘군도’를 넘어, 울돌목 회오리바다까지 잘 건너온 손예진은 “오싹한 연애를 뛰어넘는 개인 통산 최고 스코어를 기록하게 돼 감개무량하다”면서 “재밌고 착한 코미디를 응원해준 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드린다”며 잠시 회한에 젖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벤트에 당첨된 70명에게 정성스레 화장품을 나눠주며 프리 허그를 자청한 손예진은 이날 여배우를 통틀어 티케팅 파워 1위를 재확인한 뜻 깊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날은 대학까지 중퇴하며 기회는 준비한 자에게만 찾아온다는 비장한 각오로 자신을 담금질 했던 그녀가 하마터면 감격의 눈물을 왈칵 쏟을 뻔한 ‘멋진 하루’였을 게 분명합니다.
bskim012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