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투수와 그렇지 않은 투수의 차이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좋은 투수는 그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지만 그렇지 않은 투수는 무너진다. 류현진(27, LA 다저스)는 전자다. 위기에서 더 강해지는 괴물의 본능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류현진은 7일(이하 한국시간) 미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다저스타디움에서 열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경기에 선발 등판, 6⅔이닝 동안 7피안타 1볼넷 9탈삼진 2실점으로 비교적 잘 던졌다. 비록 2-0으로 앞선 7회 아웃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동점을 허용해 시즌 15승에는 실패했지만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초반에는 다소간 힘겨운 양상이었다. 1회 무사 1루 상황을 잘 넘긴 류현진은 2-0으로 앞선 2회 이날 경기의 최대 위기를 맞이했다. 선두 트럼보에게 우익수 옆에 떨어지는 2루타를 맞은 것에 이어 힐에게 우전 안타를 허용했다. 이어 로스에게는 볼넷을 내주며 무사 만루라는 절대 위기에 처했다. 자칫 잘못하면 대량실점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경기 초반의 분위기를 애리조나 쪽으로 내줄 수 있는 위기이기도 했다.

원인은 제구와 구속이었다. 좀처럼 공이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았다. 여기에 구속도 평소보다 떨어졌다. 2회 들어 트럼보에게는 89마일의 직구가 안타를 맞았고 힐에게도 90마일의 직구가 통타 당했다. 구속이 145㎞ 정도밖에 나오지 않은 셈으로 이는 류현진의 시즌 평균 구속보다도 떨어졌다. 메이저리그에서 빠르다고 할 수 없는 구속이 높게 들어가니 표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위기에 처하자 류현진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은 류현진은 그때부터 전력으로 투구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던 강속구로 애리조나 타선을 윽박질렀다. 무사 만루에서 레이몬드에게 93마일(150㎞)의 직구를 던진 류현진은 그 후 계속 구속을 높여갔다. 94마일(151.3㎞)이 찍히더니 결국 95마일(153㎞) 직구로 삼진을 잡았다.
고세위시에게도 94마일의 직구를 던진 류현진은 투수인 앤더슨을 상대로는 4개의 공을 모두 직구로 던지며 삼진을 뺏어냈다. 4개의 공은 모두 94마일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전력을 다한 류현진은 이 절대적인 고비를 넘기며 향후 경기의 순항 발판을 마련했다. 애리조나가 만든 기회가 오히려 류현진의 괴물 본능을 일찌감치 꺼낸 셈이 됐다.
류현진은 지난해 만루 상황에서 절대적으로 강한 면모를 선보였다. 올해는 다소 그 기록이 퇴색됐으나 이번 경기로 다시 한 번 뛰어난 위기관리능력을 과시했다. 류현진의 통산 만루시 피안타율은 이날 경기로 1할6푼(25타수 4안타)으로 내려갔으며 그나마 장타는 하나도 없었다. 7회에도 실점이 아쉽긴 했지만 대타 폴락의 타석 때 95마일을 던지는 등 마지막 힘을 짜내는 모습이었다. 괜히 괴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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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저스타디움(LA)=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