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핫스팟] '자유의 언덕', 홍상수 월드에 나타난 '존경받는 여자'
OSEN 최나영 기자
발행 2014.09.10 15: 15

홍상수 감독의 영화 '자유의 언덕'(4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은 '홍상수 월드'에 대한 탐험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의 즐거움을 주는 영화다. 항상 비슷해 보이고, 같은 패턴인 듯 보이지만 그 속에서 작은(혹은 보는 이에 따라 크다고도 할 수 있는) 변화를 감지하는 것도 일종의 영화적 재미일 수 있다. 홍상수 월드에서만 가능한.
'자유의 언덕'은 인생에서 중요했던 한 여인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일본인 모리가 서울에서 보낸 며칠을 다룬 작품으로 일본 유명 배우 카세 료가 주인공으로 출연한다. 홍상수 감독의 전작 '다른 나라에서'(2012)의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에 이은 외국인 배우 주연 작품이다.
모리가 서울까지 날아오며 애타게 찾는 인물은 '권'(서영화)이란 여자다. 이 권은 모리와 시간상으로 엇갈려, 그가 남긴 편지 몇 장을 받게 되는데, 그만 편지를 떨어뜨려 순서가 뒤죽박죽된다. 편지를 읽는 권도, 그리고 이를 스크린을 통해 보는 관객에게도 편지 속 시간은 순서를 잃고 엉켜있다. 영화는 이런 뒤죽박죽된 시간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뜻 모르게 갑작스럽게 돌진하는 클로즈 업은 여전하고, 홍상수 감독의 시간 놀이는 더욱 고차원적이 됐다.
홍상수 감독이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시간'의 개념임은 주인공이 읽는 책 이름을 통해서도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분리된 듯 연결돼 있는 과거 사건들은 권과 관객들이 머릿 속에서 유기적으로 배열해야 한다. 어쨌든 '존재는 시간이다'라는 말처럼, 주인공이 있는 북촌이란 공간 속에서 그가 보내는 시간이 그를 규정한다. 권과 모리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편지란 매개체의 시간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들은 물론이고, 등장 인물들은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 이는 일정정도 그들이 지식인임을 보여준다. 간단한 의사 소통을 넘어 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데 불편함이 없다. 부르주아 지식인에 대한 때론 날 서 있고, 때론 능글능글한 풍자가 돋보였던 홍상수 세계에는 여전히 부르주아들이 산다. 남녀, 술, 커피, 담배가 북촌 공간에서 부유하고 관객은 의미를 찾는 데 골몰할 것이다. 더욱이 이 복잡한 시간 퍼즐 안에서. 하지만 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냉소는 보다 무뎌졌다. 이런 홍상수 감독의 외국어 시리즈는 간단하게 외국인 배우들과의 작업상 필요에 의해 이뤄진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사실상 모리보다도 권이다. 권은 모리가 '존경하는 여자'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 지 얘기해주지는 않으나, 권은 (어떤 사건으로 추정)모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고 모리는 그녀에게 국경을 초월한 사랑과 존경심을 지니게 됐다. 모리는 그를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존경하는 여성'이라고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는데, 이는 단순한 이성의 감성 너머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홍상수 월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성적 억압 안에서 남자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 또 겉과 속이 다른 여성들에게 묘한 혐오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됐던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다른 여성들을 보여주는데, 물론 '여자는 남자의 미래'임은 관통한다. 이제 홍상수 영화 속 여성들은 조금은 이상해 보일 수 있어도 적어도 '호박씨를 까는' 사람들은 아니다. 권의 중저음 목소리와 전형적 여성적 외형의 탈피는 인상적이다.
주인공 카세 료는 홍상수 월드와 기막히게 어울린다. 장작처럼 바싹 마른 몸에 아무렇게나 씌워놓은 듯한 옷, 그렇지만 서정적인 분위기의 아우라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마치는 듯한 마지막에서 홍상수 월드가 지독히 현실적이라는 말에는 공감을 표하지 못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희망을, 누군가는 판타지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아니면 불평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여긴 홍상수 월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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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언덕' 스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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